믿음과 본능, 그 간극에 서 있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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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기사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사람들은 저마다의 아픔을 가슴속에 갖고 있다. 그들은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무언가를 믿거나 욕구. 본능에 따라 행동함으로서 위안을 얻곤 한다. 그 중 일부는 무턱대고 믿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와 같은 단순한 도식은 결국 문제에 대한 회피일 뿐, 현실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본능에 따라 충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사람들도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맹목적 신앙과 본능 사이를 중재해줄 무언가가 필요한데, 그것이 ‘이성’이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표류라는 극한 상황에서 맹목적 신앙과 본능이 파멸을 이끄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캐나다로 이주하기 위해 탔던 배의 난파 후 구명선에는 파이. 파이의 어머니, 주방장, 그리고 심하게 다쳐 곧 죽게 되는 승객 한 명이 탄다. 독실한 신자였던 파이의 어머니는 자신이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성적 판단을 배제한 채로, 생존 본능에 충실해 사람의 시체를 낚시용 미끼로 쓰던 주방장을 꾸짖고 저지하다가 결국 주방장에게 찔려 비참하게 죽는다. 주방장은 심한 죄책감을 느꼈는지 저항도 하지 않고 파이에게 보복성 죽임을 당한다. 구명선에 혼자 남게 된 파이는 주방장을 죽이고 ‘살인’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로 기나긴 표류를 시작한다.

난파 후 표류라는 생사의 기로에서 살생을 금하는 종교 계명에 얽매였다면 ‘파이’는 결코 생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주방장처럼 오직 본능대로 행동했어도, 결국 죄책감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파이는 이성적 사고로 스스로 타협점을 찾음으로써 삶을 도모하고 신앙과 생존의 교집합을 찾아낸 것이다. 폭풍우 속에서 마지막 믿음마저 무너진 채 몰인정한 신의 처분만 기다리던 무력한 그였지만 ‘식인섬’을 통해 생기를 얻고, 사람 이빨에서 의미를 찾는 것 모두가 이성적 사고의 결과였다. 섬을 떠날 때의 파이는 신에 대한 ‘믿음’과 삶에의 ‘희망’ 모두가 충만한 상태로 변해 있다. 따라서 영화에서 말하고 싶은 ‘이성’은 ‘본능’과 ‘신앙’을 중재하고 삶을 구하는 합리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스콜라 철학자 안셀무스는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이해할 수 있다”(Credo, ut intelligam)라고 말했다. 이성의 작용 이전에 신앙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라는 그의 표현처럼 신앙에는 반드시 그 근거를 제시해주는 이성이 뒤따라야 한다. 굳이 종교라는 범위에서의 신앙만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도 마찬가지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내일이면 나아지겠지’라는 맹목적 믿음을 갖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뿐, 그를 따르는 합리성과 이성 없이는 변하는 것 없이 고통은 계속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배가 침몰한 원인과는 상관없이 고통 받는 ‘나’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위해 언제나 ‘믿음’과 ‘본능’, 혹은 그 중간 어느 즈음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간 어느 즈음에는 ‘나’를 버리지 않는 이상적인 해결 방안이 있다. 우리는 파이와 같이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찾는 여정을 걷고 있는 것이다.

추성윤 기자 atom7958@g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