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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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세 호 (생명,17)

차가운 바람에 떨어지는 노란색 은행나무와 함께 상실의 고통은 언제나 이맘때에 찾아온다. 추석날 밤 모두를 밝히는 만월처럼 행복은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차오르지만 보름달이 되는 순간부터 그 모습을 계속 잃어가고 빈자리는 그림자로 채워진다. 이 그림자는 그리운 친구의 것일 수도 있고, 사랑했던 그대일 수도 있고, 나의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무엇의 그림자인지 알 수 없고 그저 빛나는 부분을 조금씩 채워가는 그림자를 보며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잊어버릴 때가 있다. 그래서 글을 썼다. 만월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간직하기 위해, 무엇을 상실했는지 기억하기 위해, 나의 고통이 어디서 오는지 알기 위해. 나의 페르소나는 모든 날 모든 순간의 감정들을 기억하고 있기를 바라면서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시를 쓰다 보면 어느 순간 여러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페르소나가 탄생한다. 여러 작품에 걸쳐 등장하는 이 서술자는 작가 본인은 아니지만, 작가 본인보다 더 작가의 내면을 드러내는 매우 솔직한 존재이다. 나에게도 여러 페르소나가 존재했다. 늘 회한으로 한 사람만을 그리워하는 사람부터, 실패감에 사로잡혔지만 막연히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 자기 죽음에 아무도 슬퍼할 사람이 없을 것이며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가치 있는 일임을 깨달은 사람까지. 이러한 페르소나들과 함께 광주과학기술원에서의 첫해를 보냈다.

나뭇가지에 겨우 붙어 있는 마지막 단풍잎을 땅에 떨어뜨리는 차가운 11월의 비가 영원하지 않은 것과 같이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이 페르소나들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였다. 페르소나를 변하게 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만남으로 모든 것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였다.

바른 언행이 존경스러운 선배부터, 그냥 스치는 만남조차 인연으로 바꿔버리는 친구, 예쁘게 말하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를 알려준 친구, 그리고 첫눈에 반해버린 그대까지. 모두 나에게 소중한 가치들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페르소나 또한 이러한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서 변하기 시작하였다. 페르소나는 말을 최대한 예쁜 단어로 쓰기 시작하였고, 인연과 약속을 소중히 여겨 타인에게 감동을 주기도 하고, 동생들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도움을 주고, 언제나 한 사람만을 바라보며 행복을 느끼는 존재로 바뀌었다.

자기가 쓴 여러 작품의 서술자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페르소나다. 분명히 작가 내면의 일부이어야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페르소나는 나의 모든 것이 되어가고 있었고, 일상에서의 행동까지 번져가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어떤 글을 써도 모든 것이 똑같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가 페르소나를 만드는 것인지, 페르소나가 나를 만드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이로부터 벗어나려 해도 페르소나는 이미 나에게 강박감이 되어 나의 행동을 지배하였다.

올해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로 강박과 자아가 구분이 안 되어 방황하고 있을 때, 영화 ‘토이스토리 4’를 보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유치한 내용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장난감 주인공인 우디가 장난감으로서 주인을 즐겁게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가치를 찾는 내용으로 다가왔다. 이 영화로부터 용기를 얻어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의 페르소나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없이 많은 노력을 했었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내가 페르소나에서 해방되는 결정적인 일이 있었다.

아직도 어제인 것만 같은 제주도 장례식장이 나에게는 너무나 커다란 일로 다가왔다. 그 충격을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처음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지금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내 페르소나와 반대되는 행동을 한 것이다. 나는 당연히 그들이 나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이미 졸업했던 선배 한 분이 광주로 내려와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는 자기도 비슷한 일을 겪었고, 그냥 왠지 자기가 내게 힘이 돼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찾아왔다고 말해주었다.

지금까지 상담사, 정신과 의사 또는 매우 가까운 사이인 사람들이 했던 이야기들 보다 더욱더 힘이 되는 말이었다. 이날을 기점으로 나는 내가 만들었던 강박으로부터, 페르소나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발판이 생겼다. 조금씩 나의 페르소나를 의식하지 않고, 행동하기 시작할 수 있었다. 이처럼 시를 쓸 때는 페르소나를 조심해야 한다. 특정한 페르소나를 의식하게 된 시점부터 더 이상 그것은 페르소나가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이럴 때에는 잠시 글을 쓰는 것을 그만두고 주변을 돌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싶다.

박 세 호 (생명,17)
박 세 호
(생명,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