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자유 (제1회 광주과기원 문학상 – 단편소설 가작)

0
346

제1회 광주과기원 문학상 공모 수상작 ②: 단편소설 부문 가작

무한한 자유

이나라샘(생명과학부)

ㅤ상조회사 직원은 기본적인 장례 방법 세 가지를 내놓았다. 매장과 화장, 그리고 수목장이었다. 요즘은 수목장도 많이 하는 추세라며 자라는 나무를 볼 때마다 어머니를 떠올리실 수 있을 거라고, 고인 분께 자주 방문하실 거라면 화장이나 매장보다 더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셋 중에 원하는 장례 방법을 선택하시기만 하면 신속하게 진행해드리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ㅤ남자는 조문객을 맞으면서,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 몰래 울면서, 달려와 준 직장 동료와 친구들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면서, 웃고 있는 엄마의 영정 사진을 보면서 내내 고민했다. 상조회사 직원은 결정하는 대로 되도록 빨리 알려달라고 말했다. 발인까지 이틀 안에 장례 절차를 준비해야 하니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계속, 계속 고민했다. 한 시간 전, 상조회사 직원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에서 결정하셨냐는 질문을 들은 이후에는 조급함까지 느꼈다. 평상시였다면 이미 결정이 끝났을 터였다. 엄마에게 물어보면 되니까. 그러나 이번에 결정해야 할 일은 죽은 엄마의 장례 방식이었고 남자의 결정을 대신 내려 줄 엄마는 환하게 웃는 본인의 사진 뒤, 관 속에 누워 있었다.

ㅤ상조회사 직원으로부터 고인의 장례 방식을 정해 달라는 말을 들은 지 6시간이 지났다. 6시간 내내 정답이 없는 수학 문제를 풀고 있는 듯한 느낌에 시달린 남자는 벽시계 안에서 돌아가는 초침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침이 1과 2 사이를 지날 때, 나주에서 올라온 이모가 신발도 벗지 않고 뛰어 들어와 영정사진 앞에 섰다. 이모는 가만히 서서 영정사진을 바라보기만 했다. 울지도 않았고 오열하지도 않았다. 이모의 눈가에서 눈물 대신 땀이 흘렀다. 갑작스러운 언니의 죽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이모의 얼굴은 사진 속 엄마와 거의 같았다. 웃지 않는 표정 빼고는. 남자가 이모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ㅤ“이모, 엄마 장례 어떻게 치를지 정해야 된대요. 화장, 매장, 수목장 중에서요.”

ㅤ대답이 없었다. 기다렸다. 이모가 뒤늦게 말했다.

ㅤ“화장으로 하자.”

ㅤ남자는 홀가분한 느낌을 받으며 상조회사 직원의 번호를 눌렀다.

ㅤ남자가 옷장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열린 옷장 문 안에 정장 상의와 하의들이 보였다. 검은색과 남색, 어두운 회색, 연한 체크무늬가 들어간 감청색. 얼핏 보아서는 구별하기 힘든 색의 정장들이 늘어서 있었다. 남자가 손을 뻗어 남색 정장 상의가 걸린 옷걸이를 집어 들었다. 잠시 손에 든 옷을 바라보던 남자가 옷걸이를 원래 자리로 돌려놓고 한참 동안 가만히 서서 옷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5분이 지나고 남자가 검은색 정장 상의와 하의를 꺼내 들었다. 옷을 팔에 걸치고 옷장 문을 닫던 남자의 손이 중간에 멈췄다. 남자가 옷장 문을 다시 열었다. 팔에 걸린 검은색 옷을 위아래로 훑은 남자가 팔에 걸려 있던 옷을 도로 옷장 안에 걸었다. 남자는 그대로 선 채 옷장 안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ㅤ장례식을 마치고 3일간의 휴가를 보낸 후 일주일 만에 하는 첫 출근이었다. 남자는 옷장에 걸려 있는 옷들을 바라보며 어떤 옷을 입고 출근해야 할지 고민했다. 남자는 출근 복장을 자신의 손으로 골라본 적이 없었다. 출근 시간에 맞춰 일어나서 씻고 나면 침대 위에는 늘 엄마가 골라놓은 출근 복장이 가지런히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한 번도 입고 나갈 옷을 골라본 적 없는 자신에게 이렇게 갑자기 옷을 고르게 만드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을 했다. 옷장 안에 있는 옷들을 다시 한 번 차례대로 훑었으나 여전히 정답은 보이지 않았다.

ㅤ남자가 침대 위에 엎어졌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씻고 나오면 차려져 있던 아침밥과 침대 위에 놓여 있던 옷이 그리웠다. 남자의 머릿속에 엄마의 영정 사진이 떠올랐고 뒤이어 엄마의 영정 사진을 쳐다보던 이모의 얼굴이 떠올랐다. 침대에서 일어난 남자가 핸드폰을 집어 들고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ㅤ“여보세요, 이모!”

ㅤ“아침부터 웬일이니, 무슨 일 있어?”

ㅤ“이모, 저 지금 출근해야 되는데 무슨 옷 입을까요?”

ㅤ“뭐?”

ㅤ“옷이요, 옷. 회사 출근해야 되거든요. 검은색이랑 남색이랑 회색 있고 감청색에 체크무늬 연한 거 들어간 것도 있는데 뭐 입을까요?”

이모는 대답이 없었다. 남자는 네가 알아서 하렴이라는 말이 나올까 봐 점점 초조해졌다. 남자가 다시 물어봐야 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대답이 들려왔다.

ㅤ“남색이 괜찮겠다.”

ㅤ남자가 이어서 물었다.

ㅤ“양말이랑 구두는 무슨 색 신을까요?”

ㅤ남자는 남색 정장과 갈색 구두, 검은색 양말을 신고 무사히 출근을 마쳤다. 회사 사람들이 남자에게 찾아와 위로를 건넸고 남자는 적절한 대답을 하면서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다행히 남자의 옷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역시 이모에게 물어보는 것이 정답이었다. 만약 이모에게 물어보지 않았다면 남자는 갑자기 주어진 고난도 문제 앞에서 수없이 머리를 굴리다 과부하가 걸렸을 것이다. 아마 처음에 골랐던 검은 정장에 흰색 양말과 검은 구두를 신고 집을 나서지 않았을까. 회사 동료들은 남자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네고 돌아서며 서로 속닥였을 것이다.

ㅤ“야, 근데 대리님 양말 봤어?”

ㅤ“너도 봤구나? 어떻게 검은 구두에 흰 양말을 신지. 진짜 촌스럽다.”

ㅤ“이 대리 충격이 많이 컸나 보네. 저렇게 이상하게 옷 입은 거 보니까.”

ㅤ“그런 것 같습니다, 과장님.”

ㅤ“자네가 신경 좀 써 줘. 그래도 입사 동기잖아.”

ㅤ“네, 과장님. 별일 없도록 잘 살피겠습니다.”

ㅤ피부에 닭살이 돋았다. 남자의 잘못된 선택은 잘못된 결과들을 불러올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남자를 향한 경멸의 빛이 깃들 수도 있다. 화장실 변기 위에 앉은 남자의 귀에 남자의 옷차림에 대한 조롱이 흘러들어 올 수도 있다. 심지어는 남자의 출근 복장이 사회성 부족과 분위기 파악 능력의 부재로 읽혀 낮은 인사 평가와 승진 누락이라는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남자는 만년 대리로 남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촌스럽고 괴상하지만 자신은 절대 그 지점을 파악하지 못하는 옷을 입은 채 나이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늙은 남자 뒤에서 서로 무언가 속삭이는, 남자보다 몇 년이나 늦게 입사한 젊은 상사들이 보였다. 듬성듬성해진 머리를 한 남자는 거북목을 앞으로 길게 빼고 열심히 무언가를 타이핑하고 있었다. 더없이 초라했고 여전히 검은 구두에 흰 양말을 신고 있었다. 과거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마이클잭슨처럼.

ㅤ현실로 돌아온 남자는 마법처럼 나타난 이모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꼈다. 남자의 선택이 불러올 재앙에 가까운 결과들을 막아 주던 엄마가 사라진 순간 현현한 축복의 존재. 남자가 선택하고 책임져야 했을 막중한 실패들을 가로막고 서서 고통과 수치심의 화살을 대신 쳐 내준 전쟁의 여신이 바로 이모였다. 이모는 엄마와 닮은 얼굴만큼이나 엄마와 닮은 현명한 결정을 내려주었다. 남자는 이모에게서 내려오는 결정들을 겸허하게, 감사한 마음으로 그저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남자는 점심시간이 되자 다시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ㅤ“이모, 저 점심 뭐 먹을까요? 회사 근처에 백반집이랑 돈가스집이랑 김치찌개집 맛있는 데 있는데.”

ㅤ이모는 신이 기도에 응답하듯 김치찌개로 남자의 질문에 응답했다.

ㅤ언제부터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릴 때부터 엄마는 올곧게 직선으로 뻗은, 다른 모든 잘못된 선택지가 제거된 최단 경로를 남자에게 제공했다. 남자가 말하기 전에 남자의 부족한 분야를 캐치해 수학과 과학 과외 선생님을 붙여주었고 남자가 선택하기 전에 가야 할 대학을 정해 입시를 통과할 수 있는 최적의 전략을 제공했으며 남자가 묻기도 전에 남자의 영양 상태를 분석해 최적의 점심 메뉴가 차곡차곡 담긴 보온 도시락을 손에 들려주었다. 남자의 모든 일, 모든 생활, 모든 선택에 있어서 엄마는 남자가 무엇 하나 결정하지 않아도 되도록 편리하고 알맞은 방안을 제공했다.

ㅤ이모는 엄마와 달랐다. 가장 다른 점은 어떤 일이든 남자가 먼저 연락해 물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모는 남자가 먼저 전화를 걸거나 카톡을 보내지 않으면 출근 복장도, 식사 메뉴도, 휴식 계획도 정해주지 않았다. 업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상사나 거래처에 보낼 이메일이라든가 남자가 만든 미팅 자료, 업무 보고서에 대한 체크도 일일이 메일이나 카톡으로 파일을 먼저 보내고 언제까지 체크해 달라는 부탁을 남겨야 겨우 시간에 맞춰 답이 왔다. 남자는 그럴 때마다 엄마에 의해 빈틈없이 돌아가는 하루를 떠올렸다. 그러나 엄마는 없었고 남자는 자신에게 엄마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를 실감하면서 이모에게 계속 물어야만 했다. 이모는 불만족스럽고 빈약한 답이나마 남자에게 전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ㅤ이모에게 처음 출근 복장을 물은 날로부터 3주가 지난 저녁, 남자는 이모가 골라 준 중국집에서 시킨 짬짜면을 먹고 있었다. 전화가 울렸다. 남자가 한 손으로 옆에 있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ㅤ“여보세요.”

ㅤ“한결아, 이모야.”

ㅤ“네, 이모. 무슨 일이세요?”

ㅤ이모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남자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허리를 폈다. 왼손을 옆구리에 얹고 오른쪽 귀에 신경을 집중했다.

ㅤ“한결아. 이모가 너 많이 힘들어하는 거 알아. 그래서 네가 말하는 거 웬만하면 다 들어주려고 했는데 이모도 이모 생활이 있잖니. 앞으로는 그렇게 다 들어주고 정해주고 하기는 힘들 것 같아.”

ㅤ남자가 다급히 말했다.

ㅤ“안 돼요 이모. 저 그럼 당장 내일 출근은 어떻게 해요.”

ㅤ“너도 성인이잖아. 그 정도는 네가 알아서 해야지.”

ㅤ“저 못해요. 지금까지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요.”

ㅤ“한결아. 네 엄마기도 하지만 내 언니기도 해. 이모도 너무 힘들거든? 당분간만이라도 혼자 있게 해 줘. 끊을게.”

ㅤ“잠깐만요, 내일 출근할 때 뭐 입을지만이라도 알려주세요!”

ㅤ남자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황급히 이모에게 카톡을 보냈다. 내일 출근할 때 입을 옷만이라도 알려달라는 남자의 카톡 메시지 옆에 쓰인 1은 사라지지 않았다. 카톡창을 뚫어지게 보던 남자가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계속되었다. 손에 땀이 나서 핸드폰이 자꾸 미끄러졌다. 길어지던 신호음이 감정 없는 여성의 목소리로 넘어갔다. 카톡 메시지 옆에 쓰인 1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짜장면과 짬뽕이 뱃속에서 뒤섞여 신물이 올라왔다. 내일은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어떤 구두를 신고 어떤 넥타이를 매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양한 색의 옷과 구두와 넥타이가 눈 앞에서 날아다녔다. 남자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모의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관자놀이가 아팠다.

ㅤ남자는 딸꾹질하듯 숨을 쉬었다. 불규칙적이고 얕은 호흡이 코와 입을 통해 동시에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했다. 다리를 떨면서 주위를 곁눈질로 살폈다. 남자의 오른편 복도에 있는 정수기 옆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동기인 김 대리와 6개월 전에 들어온 여직원이었다. 둘은 인스턴트커피 봉지로 종이컵을 휘휘 저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귀를 세웠다. 목소리는 들렸으나 말의 내용은 불분명했다. 남자는 그들이 자신의 검은 구두를 조롱하고 있음을 느꼈다. 남자의 이가 새끼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고 다리는 위아래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다리의 진폭이 점점 커졌다. 마침내 책상에 무릎이 닿자 둔탁한 소리가 났고 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열심히 새끼손톱을 물어뜯던 이와 떨고 있던 다리를 멈췄다. 잠시 멈춰있던 남자가 뜯긴 새끼손톱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 위에 놓인 컵을 집어 든 남자가 정수기를 향해 걸었다. 정수기까지 걸어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사방의 벽이 남자를 향해 조여들었다. 심장의 고동이 피부 위까지 전해져 몸 전체가 하나의 큰 북이 되었다. 쿵쿵 울리며 정수기 앞에 도착한 남자가 컵을 든 자신의 손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컵에 물을 뜨기 시작했다. 울리는 북의 박자에 맞춰 컵도 손도 정수기도 진동했다. 남자의 귀에 옆에 선 이 대리와 여직원의 대화가 들렸다.

ㅤ“대리님. 회사 앞에 새로 생긴 식당 가보셨어요?”

ㅤ“아, 설렁탕집? 아직 못 가봤어. 장사 잘 되던데. 점심시간에 아주 미어터지더라.”

ㅤ“에이, 어떤가 물어보려고 했는데. 오늘 점심때 지혜 씨랑 같이 갈 거라서요.”

ㅤ둘은 회사 앞에 새로 생긴 설렁탕집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울리는 북의 박자가 조금 느려졌다. 남자의 출현이 어색한 침묵이나 화급한 대화 전환을 불러온 낌새는 없었다. 둘은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누었다. 남자가 컵을 든 자신의 손에 시선을 둔 채 옆에서 들리는 대화에 집중하는 사이 컵에서 물이 넘쳤다.

ㅤ“엇!”

ㅤ남자가 황급히 컵을 뒤로 뺐다. 컵에서 넘쳐흐른 물이 남자의 손을 타고 아래로 떨어졌다.

ㅤ“어머, 괜찮으세요?”

ㅤ여직원이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김 대리의 시선이 남자를 향했다.

ㅤ“어? 어. 괜찮아.”

ㅤ남자는 뭘 해야 할지 몰라 우물대다 뒤로 돌았다. 흔들리는 남자의 눈동자가 복도 끝에 닿았다. 화장실이 보였다. 남자는 무턱대고 앞으로 걸었다.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거의 뛰다시피 화장실에 들어간 남자가 컵을 세면대 위에 올려놓았다. 화장실에는 사람이 없었다. 남자는 아직 격하게 뛰고 있는 심장에 오른손을 가져다 대고 심호흡을 하며 생각했다. 둘의 대화를 엿들은 건 아마 들키지 않았을 것이다. 들켰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김 대리와 여직원에게서 남자를 훑어보는 조롱이나 혐오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우려했던 바와 달리 둘의 대화 주제가 남자의 옷차림이 아닌 회사 앞에 새로 생긴 설렁탕집이라는 사실이었다.

ㅤ어젯밤, 남자는 식탁도 치우지 않은 채 이모에게 보낸 카톡 옆에 뜬 1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1은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모에게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었으나 이번에도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남자는 한없이 불안해졌다. 손발이 차가웠고 머리가 점점 어지러워지는 듯했다. 의자에서 일어난 남자가 집 안을 이쪽저쪽으로 걸어 다녔다.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어떻게든 해결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내일 아침이면 회사에 나가야 했고 그러려면 입을 옷과 신발과 양말을 골라야 했고 아침 메뉴도 정해야 했다. 엄마도 이모도 없는 상황, 그들을 대신해 남자의 미래를 결정해 줄 무언가를 찾아야만 했다. 남자는 30분이 넘게 집안을 서성거리다 문득 엄마가 죽은 뒤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은 엄마의 방문을 열었다. 엄마가 남자를 위해 남겨놓은 해답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면서.

ㅤ엄마의 방은 엄마가 죽기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남자는 옷장부터 차례차례 방을 뒤져 나갔다. 옷장 안, 침대 밑과 이불속, 책꽂이, 책상 밑과 서랍 안까지 빠짐없이 하나씩. 남자가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하나씩 꺼내 안을 펼쳤다. 혹시 무슨 쪽지나 포스트잇이 끼워져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남자가 찾아낸 건 노랗고 바삭거리는 은행잎 한 장뿐이었다. 책상 서랍 안에는 엄마의 일기가 들어있었다. 남자는 일기를 펼쳐 읽어 나갔다. 엄마의 일상 이야기뿐, 남자의 인생을 위한 해답 같은 것은 쓰여 있지 않았다. 남자가 일기를 책상 위에 내팽개치고 화장대로 향했다.

ㅤ화장대 위에는 화장품이 가득했다. 남자가 당면한 문제에는 하등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화장대 서랍을 하나씩 빼서 안을 뒤졌다. 장지갑, 귀걸이와 목걸이, 펜 몇 개, 천 원짜리 몇 장과 만 원짜리 한 장, 반지 케이스, 조그만 수첩이 들어 있었다. 수첩을 펼쳤다. 누군가의 이름과 전화번호들이 적혀 있었고 중간중간 알 수 없는 메모가 있었다. 수첩을 덮고 반지 케이스를 열었다. 반지가 꽂혀 있어야 할 홈에는 동전이 꽂혀 있었다. 남자가 동전을 집어 들었다. 어느 나라의 동전인지 알 수 없는, 백 원과 오백 원의 중간 크기 정도 되는 외국 동전이었다. 겉 테두리는 구리색이었고 가운데는 금색이었다. 한쪽에는 다리와 도시가, 반대편에는 사자가 새겨져 있었다. 동전을 도로 꽂고 케이스를 닫으려던 남자의 눈에 케이스 뚜껑 안쪽에 붙은 포스트잇이 보였다.

ㅤ‘1992.01.02 한결이를 위해
ㅤ체코 프라하’

ㅤ갈색으로 바랜 포스트잇에 적힌 검은 글씨는 엄마의 필체였다. 남자의 생일은 1989년 1월 2일이었다. 남자가 아주 어릴 때 남자를 데리고 외국 여행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스쳐 지나갔다. 동전을 자세히 살폈다. 도시가 새겨진 면의 테두리에는 PRAGA라는 단어가 보였고 반대면의 테두리에는 CESKA REPUBLIKA와 50KC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한결이를 위해. 남자는 동전이 엄마를 대신해 자신의 선택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동전은 엄마가 남자를 위해 남긴 것이니까.

ㅤ남자는 동전을 던져서 도시가 새겨진 앞면이 나오면 모든 결정을 이 동전에 맡기고, 사자와 숫자가 새겨진 뒷면이 나오면 자신을 도와줄 다른 무언가를, 혹은 다른 누군가를 찾기로 결심했다. 엄지손가락 위에 동전을 놓고 위로 튕겼다. 빠르게 회전하던 동전이 떨어져 남자의 손등 위에 얹혔다. 재빨리 다른 손으로 그 위를 덮었다. 남자는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상태로 천천히 손을 치웠다. 금색 원 안에 새겨진 다리와 도시, 테두리에 쓰인 PRAGA가 보였다.

ㅤ동전을 던져 선택한 출근 복장이 누구에게도 경멸의 대상이 되지 않은 걸 알게 된 남자는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던 동전의 결정에 대한 의구심을 점점 지워갔다. 엄마가 남긴 이 동전이 엄마와 다름없이 올바른 결정을 내려주리라는 확신이 의구심의 빈자리를 채웠다. 남자는 모든 선택을 동전을 던져 결정했다. 골라야 할 게 둘보다 많을 경우 선택지를 반으로 나눴다. 그리고 동전을 던져 한쪽을 선택한 뒤 다시 반으로 나누기를 반복하면 하나의 올바른 답이 나왔다. 동전이 정해준 결과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남자의 옷차림, 아침과 점심과 저녁 메뉴, 주말 동안 할 일, 퇴근하고 볼 TV 프로그램까지. 동전의 결정은 완벽했다. 심지어 중요한 미팅 전날 남자가 만든 네 개의 서로 다른 포맷의 발표 자료 중 동전이 고른 세 번째 발표 자료는 까다롭기로 유명한 부장이 남자의 발표가 끝나자마자 공개적으로 남자에게 칭찬을 하게 만드는 위력까지 발휘했다. 동전이 가지고 있는 완전하고 신비한 결정력은 매번 남자를 감탄하게 했다. 남자는 엄마가 남자의 미래를 위해 이 동전을 남겼다는 걸, 혼자 남겨질 남자에 대한 엄마의 걱정과 모성과 간절함이 마술적인 힘을 이 동전에 부여했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동전은 엄마의 분신이자 틀리지 않는 예언자였다.

ㅤ남자는 동전이 든 반지 케이스를 상의 안주머니에 항상 들고 다녔다. 1시간에 서너 번씩 동전이 든 반지 케이스가 제대로 있는지 왼쪽 가슴에 손을 얹어보는 일이 습관이 되었다. 안주머니에 든 반지 케이스의 딱딱함이 손에 느껴질 때마다 안정감이 찾아 들었다. 퇴근하고 집에 온 남자는 가장 먼저 동전을 깨끗이 닦았다. 소독제를 휴지에 적셔 동전을 꼼꼼히 닦은 뒤, 보드라운 마른 천으로 물기를 제거했다. 깨끗이 닦인 동전은 반지 케이스에 넣어서 가장 눈에 잘 띄는 TV 위에 올려놓았다. 남자는 TV를 볼 때도,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도, 게임을 할 때도 수시로 TV 위에 놓인 반지 케이스를 확인했다. 잘 때는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반지 케이스를 올려놓았다. 자고 일어난 남자는 제일 먼저 케이스를 열고 동전을 확인했다. 동전이 무사히 안에 들어 있는 걸 눈으로 봐야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ㅤ평소처럼 눈을 뜬 남자가 반지 케이스를 열고 동전을 확인했다. 어제와 다름없이 잘 꽂혀 있던 동전을 빼서 손에 든 남자가 옷장 앞에 섰다. 출근할 옷을 골라야 했다. 후보는 네 개였다. 남자가 동전을 던졌다. 앞면이 나왔다. 남자가 다시 동전을 던졌다. 또 앞면이었다. 남자가 옷장에서 남색 정장을 꺼냈다. 씻고 나온 남자가 양말이 든 서랍을 열고 동전을 두 번 연달아 던졌다. 두 번 다 앞면이 나왔다. 남자가 긴 검은 양말을 꺼냈다. 남색 정장을 입고 검은 양말을 신은 남자가 신발장 앞에 섰다. 남자는 다시 한 번 동전을 두 번 연달아 던졌다. 이번에도 두 번 다 앞면이었다. 남자는 갈색 구두를 신으면서 기억을 되짚었다. 남자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여섯 번이나 같은 면이 나온 건 처음이었다.

ㅤ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시간을 보니 12시 3분이었다. 남자는 점심 메뉴를 정하기 위해 안주머니에 넣어 놓은 동전을 꺼내 손에 쥐었다. 후보는 네 개였다. 항상 후보에 들어 있던 돈가스집과 백반집 외에 중국집과 생긴 지 얼마 안 된 설렁탕집이 추가됐다. 남자가 동전을 던졌다. 앞면이 나왔다. 한 번 더 동전을 던졌다. 또 앞면이 나왔다. 오늘의 여덟 번째 앞면이었다. 2의 8승, 256. 여덟 번 연속으로 앞면이 나올 확률은 256분의 1이었다. 석연치 않았으나 동전이 틀릴 리는 없었다. 남자는 벗어 놓았던 정장 상의를 집어 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ㅤ소파에 앉은 남자의 시선은 손에 들린 동전에 고정되어 있었다. 남자는 동전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 동안 연속으로 앞면이 나온 횟수를 헤아렸다. 아침에 출근 복장을 정할 때 여섯 번, 점심 메뉴를 정할 때 두 번, 보고서의 폰트와 형식을 정할 때 네 번, 퇴근할 교통수단을 정할 때 한 번, 장을 보러 들를 마트를 정할 때 두 번. 오늘만 열다섯 번이었다. 남자가 동전을 뒤로 돌렸다. 남자의 눈에 멀쩡히 자리하고 있는 동전의 뒷면이 들어왔다. 눈을 씻고 봐도 분명 동전의 한 면은 뒷면이었다. 그러나 동전을 던지기만 하면 뒷면이 사라지기라도 한 듯, 던지는 족족 앞면이 위를 향했다. 점심때까지는 신기한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일곱 번이나 앞면이 연달아 나오자 시험의 답을 마킹하는데 일렬로 이어지는 같은 번호를 볼 때 느껴질 법한 불안함이 찾아 들었다. 무언가 잘못된 건 확실했으나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남자가 핸드폰으로 계산기를 켜 2를 열다섯 번 곱했다. 2를 열다섯 번 곱한 값은 32,768이었다. 어딘가에서 얼핏 주워들었던 로또 당첨 확률이 생각났다. 1등에 당첨될 확률은 800만 분의 1, 2등은 130만 분의 1, 3등은 3만 분의 1이라고 했던가. 로또 3등 정도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3만 분의 1 정도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불안함을 억눌렀다. 동전이 틀린 답을 내놓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앞면이 열다섯 번 연속으로 나온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남자는 알 수 없지만 동전에 담긴 초자연적인 힘이 찾아낸 어떤 이유가.

ㅤ남자가 고민하는 사이 시간은 8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저녁을 먹어야 했다. 다시 동전을 던져야 할 시간이었다. 집에 있는 라면 종류를 확인했다. 네 종류가 있었다. 신라면과 너구리, 짜파게티, 비빔면. 남자가 동전을 엄지손가락 위에 올렸다. 동전을 올려놓은 채 한참 가만히 있던 남자가 갑자기 동전을 위로 튕겼다. 회전하며 떨어진 동전이 남자의 손등 위에 안착했다. 남자가 숨을 멈춘 채 동전을 가린 오른손을 천천히 옆으로 치웠다. 앞면이었다.

ㅤ남자가 동전을 연달아 던지기 시작했다. 앞면, 앞면, 앞면……몇 번이나 동전을 던져도 계속 앞면이었다. 동전의 무언가가 잘못되어 버린 것 같았다. 남자는 부정했다. 이럴 수도 있다. 앞면이 여러 번 나올 수도 있다. 언젠가는 뒷면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동전의 뒷면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던질 때마다 앞면만 나타났다. 동전이 잘못됐다면 삶의 수많은 선택지를 어떻게 결정해야 하는 걸까. 엄마도 없었고 이모도 남자의 선택을 도와주지 않을 게 뻔했다. 남자는 손등에 얹힌, 앞면을 내보인 동전을 바라봤다. 앞면이 뒷면으로 변하기라도 할 것처럼.

ㅤ그때 남자의 머릿속에 생각하기도 싫은 가정이 떠올랐다. 지금의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알맞게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하며 끔찍한 가정이었다. 만약 동전의 앞면이 나오게 만든 것이 남자의 무의식이라면? 계속해서 동전을 던져 온 남자의 손과 팔과 근육과 신경이 남자의 무의식이 원하는 면이 나오게 만드는 최적의 힘과 위치를 계산할 수 있게 된 거라면? 동전이 알려준 선택지가 엄마가 동전에 남긴 초월적인 힘이나 자연의 신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저 뇌가 남자의 손과 근육에 보낸 신호를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결과라면? 결국 모든 게 남자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면?

ㅤ남자는 고개를 가로젓고 코웃음을 쳤다. 육체의 행동으로 정신을 다잡으려는 듯이. 말도 안 되는 비약이자 망상이라고 치부하려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남자는 저 깊은 곳에서 직감했다.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그 생각에서 풀려날 수 없다는 사실을. 겉으로 애써 부정하려 해도 남자의 무의식 속에서 그 믿고 싶지 않은 생각은 이미 진실이었다. 자신이 연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위치를 알 수 없는 근원에서, 자신을 스치는 모든 것에서 이미 느끼고도 어떻게든 만들어지지 않는 사랑을 만들어내려는 사람처럼 남자는 무엇이라도 해보려고 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거나 코웃음을 치거나 “말도 안 돼”라는 혼잣말을 지껄이는 것처럼 의미 없는 행동이 아닌 의미 있는 무언가를. 그래서 남자는 동전을 던지기로 했다. 남자는 동전을 던지면서 말했다. 이번에는 뒷면이 나올 거야. 그러나 남자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앞면이었다.

ㅤ앞면이 나온 동전을 바라보던 남자가 천천히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제야 온전히, 의식의 수준에서 진실을 받아들였다. 이 동전은 마법의 동전 따위가 아니었다. 남자의 엄지손가락이 가한 힘에 의해 앞뒷면이 결정되는, 자연의 물리법칙을 따르는 다른 동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하나의 동전일 뿐이었다. 남자의 신경에서 신호가 전달되어 손가락 근육이 동전을 튕겨 올리는 순간 결과는 정해진다. 결국 모든 것은 남자의 움직임이 결정한 것이었다. 동전이 선택했다고 믿고 걸었던 길은 남자의 무의식이 스스로 선택한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흔들 다리였다. 숨이 찼다. 지금까지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낡은 다리를 튼튼한 돌다리로 착각한 채 걷고 있었다. 오늘의 옷이 남자의 미래를 통째로 부숴버릴 수도 있었다. 설렁탕 집에서 먹은 소면이 기도에 걸려 죽을 수도 있었다. 남자가 작성한 보고서가 평생 승진길을 막아버릴 수도 있었다. 퇴근할 때 탄 버스가 화물차와 부딪혀 남자의 온몸이 으스러질 수도 있었다. 동전의 선택이라 착각했던 남자의 무의식이 벌인 일들을 남자의 미래나 목숨을 대가로 책임져야 할 수도 있었다.

ㅤ든 게 없는 뱃속에서 진실이 올라와 목 언저리에 걸렸다. 명치가 차가웠다. 남자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했다. 남자의 일들을 대신 책임져 줄 엄마와 이모도, 동전의 마법도 깨져버렸다.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정답이 없는 수천수만 갈래의 길 중 하나를 남자 대신 선택해 줄 무언가가. 주사위, 타로,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아빠, 좋아하던 대학 선배, 점술과 사주…… 온갖 것을 떠올렸지만 남자가 온전히 믿을 만큼 완벽한 것은 없었다. 어쩌면 그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는지도 몰랐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고 평생 동안 착각해 온 것일지도 몰랐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다리와 허리가 저렸다.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았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움직이지 못했다. 오른 다리와 왼 다리 중 어느 쪽을 먼저 세우며 일어나야 할지 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ㅤ남자가 책상 위에 놓인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21년 동안 근무하며 목격한 사망 현장 중 가장 이해되지 않는 현장에서 나온 사망자의 부검 결과였다. 보고서는 매우 얇았다. 질병이나, 외상은 없었다. 사인은 아사였다. 보고서는 사망 현장의 불가해함을 몇 배는 증폭시켰다. 사망한 남자는 부엌의 식탁 바로 옆에 쓰러져 있었다. 부엌 찬장에는 종류별로 구비된 라면과 햇반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식재료가 가득 든 장바구니가 식탁 위에 놓여 있었으며 냉장고는 온갖 반찬과 음식들로 채워져 있었다. 움직이지 못할 만한 질병이나 외상이 없는 30대 남자가 음식들로 가득 찬 부엌에 누워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대로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주변인 조사에서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회사원이었으며 최근에 어머니가 죽긴 했으나 그 뒤에 별다른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남자는 이 사건을 도대체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약이나 피 묻은 칼, 목을 맨 밧줄이라도 나왔으면 뭘 해보기라도 하겠건만 이 황당한 사건은 남자의 매뉴얼에는 없는 종류의 사건이었다. 타살이라기엔 아무런 물증이 없었고 자살이라기엔 상식의 한계를 한참 벗어날 정도로 황당한 자살이었다. 만약 이게 정말로 자살이라면 바로 앞에 수많은 음식들을 놔두고 굳이 아사라는 자살 방법을 선택한 사망자의 의지와 자제력에 기립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ㅤ머리를 벅벅 긁고 있는 남자에게 남자가 다가왔다.

ㅤ“선배, 점심 드시러 가시죠?”

ㅤ“후, 그러자. 답이 안 나온다.”

ㅤ남자는 책상 위에 놓인 담뱃갑과 외투를 집어 들고 일어났다. 경찰서 밖으로 걸어 나온 남자가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ㅤ“야, 뭐 먹을래.”

ㅤ“그러게요. 뭐가 좋으세요?”

ㅤ남자가 말했다.

ㅤ“모르겠다. 아까 2팀 애들은 뭐 먹으러 간 거야?”

ㅤ“아마 김치찌개 먹으러 갔을걸요? 저기 마트 뒤에 새로 생긴 데가 꽤 괜찮다던데요.”

ㅤ남자가 담배 연기를 길게 뱉었다.

ㅤ“그럼 거기로 가자.”

ㅤ남자와 남자는 마트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