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를 그리며(제2회 광주과기원 문학상 – 소설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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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광주과기원 문학상 공모 수상작: 소설 부문 당선작

스위스를 그리며

이승필(전기전자컴퓨터전공, 18)

1.
때때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을 때,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할 때, 내 능력이 모자라 보일 때, 하늘을 올려다 볼 때, 밥 먹을 때, 똥 쌀 때, 잘 때, 그 밖에 수많은 때, 때, 때. 그런 때면, 시원하게 밀어낼 순 없는 걸까, 하고 켜켜이 쌓인 내 때를 돌이켜 보는 거야. 왜 이렇게 더럽지, 그런 타박을 해가면서.
모르겠어. 누군 생판 남의 장례식을 보면서도 지가 죽은 것 마냥 슬퍼하는데 왜 난 이렇게 죽고 싶어 안달이 났는지. 말로만 하니까 그렇지, 주위에선 그렇게 말하지만… 글쎄,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정말 죽고 싶은 게 맞는지.
다만, 죽는다면 안 아픈 방식으로 죽고 싶어. 몇 층에서 떨어져야 안 아플 수 있을까? 2층은 한참동안 고통스러워하다 죽을 것 같고. 11층은, 음… 좀 많이 망가지지 않을까? 시각적으로. 목을 메다는 것도 좀 아닌 것 같아. 죽기까지 오 분이 넘게 걸린다는데, 그 정도로 죽어야하나 싶거든. 어차피 기다리면 죽을 텐데. 요새 수면제는 간에 기별도 안 온다 그러고. 바다에 빠지는 게 제일 괜찮은 것 같아. 그래서 가끔 일부러 세숫대야에 고개를 처박고 있어. 하나, 둘, 셋… 그러다 보면, 어느샌가 취리히 국제공항에 도착해 있는 거야. 맑은 공기. 청청한 하늘. 저 멀리 알프스가 보이는 풍경 아래서 팔뚝에 약물을 꽂고 조용히 죽어가는 거지. 낭만적이지 않아? 물론 그렇지 않을까하는 상상 뿐이긴 하지만.
그야 난 스위스에 가 본 적이 없으니까. 한 번. 딱 한 번. 가볼 기회가 없진 않았어. 지인들이 하나, 둘, 유럽 여행을 갔다 왔고, 그들이 꺼낸 사진은 보정이 잔뜩 들어가 하늘이 파워에이드마냥 파랬고, 그건 내가 바라보는 포카리처럼 밍밍한 세계와 대조를 이뤘고, 실수로 아직 안 가봤다는 취지의 말이라도 했다간, 뭐? 아직 한 번도 안 가봤다고? 꼭 말하는 코끼리 ‘코식이’를 보는 듯한 눈빛을 보내왔고, 그래서일까 그다지 끌리진 않았지만 끌리지 않는다고 솔직히 말하려니 꼴사납게 질투한다 보일 것 같았고, 점점 나도 유럽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듯 여겨졌고… 돌고 돌아 동생이랑 유럽 전역을 돌아보기로 결심했지. 처음은 프랑스, 이어서 네덜란드, 독일, 체코, 이탈리아를 주욱 돈 다음 – 대망의 스위스로 향하는 계획을 세웠어.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사실 말이 안 되는 계획이었지. 고작 3주 동안 6개국을 돈다는 게 아무래도 쉬운 일은 아니잖아.
뭐, 대충 짠 계획이 으레 그렇듯 첫 여행지 파리에서부터 벽에 부딪혔어. 영어도 안통하고… 어딜 가야할 지, 어떻게 가야할 지도 잘 모르겠고… 돈은 돈대로 모자라고… 하지만, 그 따위 보다도 훨씬 힘들었던 건, 이곳은 내가 속한 곳이 아니다, 그런 기분이 드는 거였어. 샤를 드 골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그랬지. 마치 공기부터가 날 거부한다고나 할까? 뭣 때문이었을까. 내가 밥을 먹을 때 그들은 빵을 먹었기 때문일까? 내가 소주를 마실 때 그들은 와인을 마셨기 때문일까?

2.
여행 이튿날이었어. 밤 10시, 그제야 해가 지기 시작하는 파리의 여름 한 가운데서 우린 난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삥을 뜯겼지. 여섯 명 정도가 둘러쌌었나. 난 순순히 지갑을 열었어. 돈을 꺼내는 내 손을 동생이 막았어. 주지 말자.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그 옆엔 한국인 관광객들이 돗자리를 펴고 와인을 까던 중이었어. 간간이 들리는 한국말, 웃음소리. 정작 도와주세요, 라고 외쳤을 때 돌아온 침묵. 무거운 침묵. 오후 10시 20분의 어스름. 그 아래에서 홀로 반짝이던 에펠탑. 역시 당연한 결과라면 결과겠지만, 우린 돈을 뺏겼어. 100유로 정도. 동생이랑 한참 부둥켜안고 울었어. 서럽게. 아주 서럽게. 그건 꼭 돈을 뺏겨서나 뺨을 맞고 밀쳐져서라기보단, 또 에펠탑 아래 그 많은 사람 중에서 단 한 사람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였다기보단…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라고 물어온 동생의 그 한 마디 때문이었어. 난 아무 말도 못했어. 그러게
우리가 뭘 잘못했을까.
여느 해보다 이례적으로 더웠던 파리의 밤, 그래서인지 유독 후덥지근했던 지하철, 울다 지쳐 어깨에 기대오던 동생, 어깨에 스미던 온기, 차창에 비친 내 얼굴, 마주 본 내 얼굴들 사이에서 거진 드러누운 채로 구걸하던 난민 여성, 1 유로만 주세요, 1 유로만… 우리완 아무 관계도 없던 사람인데 왜 그녀의 모습이 그리도 상처로 다가왔을까. 별안간 구역질이 솟구쳤고, 그 탓에 혀뿌리엔 기묘한 단맛이 느껴졌지. 아 혹시 이게 파워에이드의 맛인가. 포카리랑 별로 다르지도 않네. 그렇게 생각하니까 어쩐지 파리의 지하철이 서울의 2호선과 다름없이 느껴지더라.
그 다음에 어떻게 됐냐고? 어떻게 되긴. 여행이랍시고 디즈니랜드나 루브르 박물관 따위를 들락거렸지만 영 기분이 안사는 거야. 디즈니랜드 퍼레이드에서 폭죽이 펑펑 터지는데 아무런 감동도 느껴지지 않았어. 에펠탑과 디즈니 사이의 온도차가 하도 커서 오히려 우울해졌지. 프랑스에 며칠 더 머무르다가 덜컥 한국행 비행기를 예매해버렸어. 포카리나 파워에이드나 거기서 거기라면, 차라리 익숙한 걸 마시는 게 낫지 않겠냐는 마인드로 말야.
모든 기회는 떠나가고 난 다음에야 안다잖아.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난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그제야 아, 스위스는 안락사가 합법이었지, 하고 떠오르더라. 그 순간 비행기가 슈웅 달리더니 공중에 떴어. 동시에 지구의 중력이 날 꽉 짓눌렀고, 와아 이대로 대한민국으로 직행이겠거니, 웬걸 비행기는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옆으로 누웠고, 창밖으로 파리 시내의 불빛들이 보였고, 불빛들은 뭐가 불안한지 자꾸만 깜빡거렸고, 아아, 나만 고통스러운 게 아니구나, 동생도, 난민들도, 관광객들도, 한국의 국민들과 – 파리의 시민들마저도 모두 고통스러워하고 있구나… 안락하지 못하게 죽어가고 있구나… 속으로 스위스를, 취리히 공항을 그리며 서서히 잠에 들었어.

3.
결국 삶은 누구에게나 시린 법이겠지. 마치 시베리아의 바람처럼, 아니, 그보다 시린 빙하기의 블리자드처럼 갑자기 훅 들이쳐서 뼛속까지 얼려버리는… 그런 게 인생이겠지. 강추위 속에서 몇 종은 이미 멸종하고 말았을 거야. 살아남기 위해 인류는 독毒해질 수밖엔 없었어. 더도 덜도 말고, 딱 바이러스만큼.
그거 알아? 바이러스는 빙하 속에서도 죽지 않는대. 언제 녹을지도 모르는데 꾸역꾸역 버티는 거야. 백년이고 이백년이고. 그러다 누군가 몸에라도 들어가면 숙주를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파먹어 버려. 그 모습을 보면, 참, 독하다 독해… 하는 말이 절로 나와. 왜 저런 놈들이 이 지구에 태어났는지, 왜 하필 우리 시대에 탄생했는지 다들 개탄해 마지않지만
한편으론 모두들 바이러스를 동경하고 살겠지. 숙주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만은 살아남겠다는 의지. 사실 이 지독한 빙하기를 견뎌내려면 그 정도 의지는 필요하지 않겠어? 심지어는 바이러스를 롤 모델로 삼는 사람도 있더래니까. 참 한심스럽지만… 꼭 그 사람들이 잘못됐다 말하기도 뭐하지. 하기사
바이러스가 뭘 잘못했겠어.
걔는 그냥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숙주의 거센 혈류를 타고 그냥 돌고 있었을 뿐일텐데. 에펠탑을 찾은 우리 형제처럼, 그 옆 자리에 우연히 앉은 한국인 무리처럼, 지하철 바닥에 누운 난민 여성처럼… 결국 누구에게도 잘못은 없겠지. 다만 관계라는 게, 또 삶이라는 게 필연적으로 상처를 수반할 뿐이겠지. 바이러스가 숙주를 죽이 듯, 또 숙주의 백혈구가 바이러스를 죽이듯 말야.

4.
동생은 고등학교를 자퇴했어. 왕따 때문에. 공부를 잘해서 특목고에 간 애였어. 그렇다고 음침한 성격도 아니라 주위엔 늘 친구가 그득했지. 오히려 내가 왕따를 당하면 당했지, 동생이 따를 당할 거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단 말야. 충격이었어. 충격이었는데, 그런 날 한층 가슴 아프게 만들었던 건 그 소식을 들은 때가 애가 학교를 나오고 두 세 달이 지난 시점이었단 사실이었어. 난 대학 기숙사에 살았고, 엄마도 아빠도 내게 그런 소린 하지 않았거든. 그러니까 방학을 하고 내가 집에 돌아와서야 소식을 전해 듣게 된 거야.
이해는 가. 학교 측에 학폭위를 열고, 가해자 학부모를 만나고, 동생은 동생대로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피폐해졌으니… 내게 알릴 겨를이 없었겠지. 다만 이해완 별개로 가족과 슬픔을 함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가장 가깝다 믿었던 사이에도 존재했던 두 세 달의 시차가 내 가슴을 무겁게 했어.
그 이후로 밤만 되면 동생이 훌쩍이는 소리가 벽을 타고 집안 가득 채웠고, 종종 부모님께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다, 아니 그 새끼들을 잡아 죽이고 싶다 얘기했어. 그럴 때면 부모님은 아무 말 않고 동생을 꽉 끌어안았지. 품 안에서 동생은 울었어.
우린 몇 번의 학폭위와 면담을 거쳤어. 아버진 학교 쪽에서 처리하지 못하면 법정에 설 거라고, 끝까지 갈 거라고 말씀하셨지만 결국 그렇게 되진 않았어. 동생이 학교에 가서 가해자를 봐야하는 일에 진력이 났거든. 처벌은 흐지부지 되고, 동생은 마음을 굳게 먹고 검정고시를 준비하기로 했어. 걔는 항상 굳게 먹었다고 말은 했지만 그러면서도 항상 눈가엔 어떤 습기가, 내 마음을 저미는 습기가 있었지.
그래서 간 여행이었어. 돈이 몇 천이 들어도 상관없다, 즐기고만 와라, 아빠가 말했지. 아빠의 목소린 전에 들어본 적 없는 무거운 아우라를 풍겼어. 엄마는 별로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 같아. 혹시라도, 만약의 일이지만 죽어버리면 어떻게 해. 엄만 아무도 안듣는 곳에서 내게 말했어. 엄마가 동생을 보는 시선은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잔을 보는 그것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지. 지금 돌이켜보면 우리 가족의 가슴엔 하나같이 비수가 들어와 박혀있었던 거야.
돈을 뜯기고 온 날 밤, 동생은 서럽게 울었어. 울다가 벽에 머리를 꿍 찧기도 하고, 혼자 욕설을 중얼거리기도 했지. 죽고 싶다, 죽고 싶어. 아니, 죽이고 싶다, 죽이고 싶어 였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밤이 다 샐 때까지 난 동생의 한 마디를 곱씹을 수밖에 없었어.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5.
언제였을까. 하루는 동생에게 가장 창피했던 날이 언제냐 물었어. 뭐하다가 그런 이야기가 나왔더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우울한 자리는 아니었어. 곧 전에 나도 창피했던 일을 풀어놓았고, 동생이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나거든. 동생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 말을 들었을 때, 하고 답했어. 무슨 말?
그 엄마에 그 새끼구나
하는 소리. 난 잠시 벙 쪘어. 뭐? 누구한테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 동생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주차장이었다고 했어. 학폭위가 끝나고 돌아오려 하는데, 걔네 엄마가 우릴 보곤 적당히 하라 했다는 거야. 이제 시험 기간인데 왜 지 새끼 공부를 방해하냐 이거지. 엄마가 발끈했고, 아니 지금 우리 애는 자퇴를 했는데 그런 소리가 나오냐고 따졌어. 답변이 더 웃겨. 엄만 지 새끼만 소중한 줄 알지 말라고, 우리 애도 생각해 달라고 했다는 거야.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고 끝내 그 여자가
그 엄마에 그 새끼구나
말하고 갔다더라고. 엄마와 자길 쳐다보던 시선을 잊을 수가 없대. 물건을 품평할 때의 눈. 우리 엄만 값싼 옷에 옅은 화장을 한 반면, 상대는 무슨 명품을 그렇게 두르고 왔던지… 그냥 그 상황 자체가 그렇게 창피할 수가 없다는 거야.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동생 별명이 짝퉁이었대. 동생이 첫 등교날 입고간 옷이 짝퉁이었거든. 여자 친구와 맞춘 커플티였어. 분홍색 맨투맨. 그리고, 그 별명을 붙인 게 걔였대. 걔는 동생 뒤에서 카톡방을 만들고, 동생의 사진을 합성하고, 조롱하고, 면전에서 면박을 주고, 야 짝퉁! 불러대고, 식판을 뒤엎고, 발을 걸고, 넘어지면 박장대소를 하고… 하루는 동생이 물어봤대. 자기가 뭘 잘못했냐고, 뭘 잘못했는데 그러는 거냐고. 걔가 말했다는 거야. 넌 너무 나댄다고. 어휴, 이
아니다, 말을 말자.
하지만 동생이 정말 힘들어 했던 건 괴롭힘 그 자체가 아니라, 자기에게 동조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 잘못은 그 애가 아니라 자기가 한 것 같다는 느낌, 그 덕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던 성찰, 내가 뭘 잘못했을까, 뭔갈 잘못했으니까 그러겠지, 해답 없는 질문과 자책이었어.

6.
가끔 매머드를 상상하곤 해. 눈을 감고, 몸을 털로 뒤덮지 않고선 버틸 수 없었을 빙하기의 추위를 상상해 보는 거야. 하나, 둘, 셋… 그럼 저 멀리 하얀 눈밭이 보여. 녀석들은 옹기종기 모여 서로의 체온을 나누고 있어. 새끼는 바람에 맞지 않게 가장 가운데 두고선. 제일 바깥에 선 아버지 매머드는 털 위로 고드름이 달렸어. 주위는 그 정도로 추워. 줄기차게 눈보라가 휘날려서 앞이 보이지 않아. 오줌을 싸면 곧장 얼어붙지. 물을 마시기도 쉽지 않아. 얼어붙었으니까. 그래서 무리는 끊임없이 이동해. 움직이고 또 움직이다 지나치게 늙은 할아버지 매머드가 자진해서 무리와 떨어져. 더 이상 무리의 이동을 따라가기 버겁다 느꼈겠지. 가족 매머드의 눈시울이 붉어지지만, 자연은 엄한 법이야. 할아버지는 점점 멀어져. 무리와 꽤 떨어졌다 싶으면 어떻게 알았는지 놈들이 주위로 몰려드는 거야.
수십 명의 인간들이.
상상 속에서 할아버지 매머드는 순순히 돌을 맞아. 날선 돌이 옆구리를, 엉덩이를, 배때지를 가르고 들어오지만 할아버지는 저항 한 번 하지 않아. 가냘프게 비명을 질러보지만 바람 소리에 묻히고 말아. 살갗에선 피가 줄줄 흘러. 그 꼴을 본 인간은 멈추긴 커녕 피가 흘러나오는 부위에 공격을 집중해. 곧이어 매머드는 쓰러지고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러. 매머드의 단말마만이 오래도록 설원에 울려퍼져. 그 소린 저 멀리 이동 중인 매머드 가족의 가슴에 들어가 박히겠지.
그렇게 매머드는 멸종했어.
난 이해가 가질 않아. 왜 너희들은 스위스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거지? 어디로 놀러 갈지보단 어디로 죽으러 갈지 계획해야하는 거 아냐?
A: 난 올해 스위스 가려고. 너는 어디 가게?
B: 아, 전 그랜드 캐니언으로 가려구요. 스위슨 비싸서요.
A: 그래? 하기야 요새 스위스는 너무 비싸니깐 그 쪽이 나을 지도 모르겠네. 떨어지면 한 방이잖아.
B: 에이, 저도 돈만 있으면 스위스로 가고 싶네요.
A: 그럼 돈을 모으는 편이 낫지 않아?
B: 하루 빨리 죽어야죠.
그러지 않고 매년 즐겁게 휴가를 떠나는 의미가 뭔데? 어떻게 아무런 수치도 죄책감도 없이 그렇게 편한 표정인 거지? 너희 때문에 매머드가 죄 죽었는데, 스텔라바다소와 테즈메니이아 늑대가 없어졌는데, 과달루페라카라카라를 더 이상 볼 수 없는데, 포클랜드 개와 도도새가 멸종했는데, 너희가 얘네들보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대체 뭐냐고. 아니, 죄책감을 느끼진 않더라도 최소한 얘네를 전부 죽이면서까지 꾸역꾸역 살아갈 이유는 있어야지 않겠냐. 이 뻔뻔한 인간들아. 지겹지도 않아? 남에게 피해만 주는 거. 천상갑이고 박쥐고 매번 다른 동물 탓을 해가면서 오늘도 그렇게 “는적는적” 지구덩이를 파먹고 살아가는 짓 말야. 지치지도 않냐고.
도저히 모르겠다.
난 그냥 내가 살려면 누군가는 상처를 입어야하는 제로섬 게임이 지겨울 따름이야. 싸우기도 지쳤어. 내가 손해를 보고 말지. 차라리 죽고 싶어. 인생은 어째서 이 모양 이 꼴인지. 지독하디 지독한
인생.

7.
올해 초의 일이었어. 코로나가 기승을 부려 사회적 거리두기 명령이 떨어졌지만, 한편으로 백신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 오가 사회 전체가 묘한 활기를 띠었어. 화이자, 모더나, 아스트라제네카… 뭐는 mRNA 백신이고, 뭐는 바이러스 벡터 백신이고… 다들 난생 처음 들어본 제약회사와 백신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댔어. 그 속에는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밖에 나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담겼지. 흙 위로 새순이 트고, 학교엔 신입생이 들어오고, 그런 활기 속에서 난
자살을 결심했어.
신입생들과 술을 마실 때였어. 학교 측에선 OT나 MT를 막았지만 우린 몰래 술자리를 마련하곤 했지. 떠들썩하게 술판을 놓진 못해도 피차 얼굴이나 익히는 차원이었어. 신입생들은 하나같이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어. 그래, 넌 어디 고등학교 나왔다고? 아, 좋은데 다녔네. 누구누구 선배 알아? 난 보이는 애들마다 저런 질문을 했지. 별로 궁금하진 않았지만 그나마도 안 물어보면 이야깃거리가 전혀 없었거든. 우린 함께 카스와 참이슬에 푹 젖었어. 취한 뒤에도 뭉개지는 발음으로 너 으디 고등학교 나왔다 그랬지? 하고 물었어. 아, 아까 물어봤나? 뭐? 어디라고? 무슨 고등학교?
술이 확 깨더라. 그 친구를 다시 봤어. 앳된 얼굴. 두꺼운 플라스틱 안경을 끼고 머린 샛노랗게 염색한 신입생. 동생과 같은 나이일 그 친구 입에선 분명 동생이 다녔던 고등학교의 이름이 나왔어. 순간 어렴풋이 떠도는 알코올 냄새와 안주 냄새, 어두침침한 조명과 그 아래 한층 붉게 보이던 면면, 그 밖에 내 주위에 있던 모든 사물이 낯설게 다가왔어.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테지만 난 전부 변한 것만 같았어. 머리가 어찔하면서, 순간 목 아래로 뜨거운 물이 치밀었어. 포카리의 밍밍한 단맛이 혀뿌리에서 느껴지면서
동생이 떠올랐어. 검정고시와 수능을 잘 치고 당당하게 대학에 입학한 동생. 이젠 곧잘 웃고 다니는 동생. 걔도 지금쯤 선배들과 술을 마시려나. 어느 고등학교 나왔는지 물어보면 뭐라고 답할까. 저 고등학교 이름을 댈까, 아니면 고등학교를 나오지 않았다고, 검정고시를 쳤다고 할까. 언젠가 동생은 그 새끼 이름 석자를 알려주고선 부탁을 했었지. 형, 나중에라도 그 새끼를 만나면 꼭 혼내 줘. 아니, 죽여 줘, 였는지도 모르겠지만 난 태연하게, 당연하지, 내가 누구냐. 나만 믿어. 하고 말했었지.
그 친구는 다른 선배나 신입생과 허물없이 농을 나눴어. 테이블 위에선 안주로 시킨 알탕이 부글부글 끓었어. 뭉그러져 형체를 알 수 없는 재료들이 안을 떠다녔어. 저기… 하고 입을 떼자 그 친구가 날 바라봤어. 그 친구의 이름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뜻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어. 걔는 날 멀뚱히 쳐다봤어. 왜 불렀냐는 표정으로. 난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어. 걘 피식 웃으며 선배 취했네요, 하고 말했어. 그러게. 취했나 봐.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자 알탕에 떠오른 기포처럼 둥근 공기 방울이 위로 올라가는 듯 했어. 나의 폐는 빠져나간 공기 방울만큼 바짝 말라붙었고, 조금은 숨을 쉬기 힘들어졌어. 술을 한 모금 들이켰지만 웬걸 술에선 쓴 맛이 아니라 이온 음료에서나 날 법한 싱거운 단맛이 났어. 몸이 안 좋아서 먼저 들어간다 말하고 술자리를 나왔지.
취기 때문인지 가로등이 불안하게 몸을 떨었어. 바로 옆 공원 위로 몇 사람이 주저앉은 모습이 보였지. 문득 그 여름의 파리가 겹쳐 보이더라. 도와달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어차피 누구도 날 보지 않을텐데 하는 마음이 목구멍을 막았어. 과연 아무도 내겐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 오로지 초저녁에 뜬 달빛만 내 얼굴을 핥아주었지. 끝내 그 친구의 이름은 묻지 못했다는 게 어찌나 부끄럽던지. 하기야 이름이 뭐가 중요하겠어. 걔가 우릴 삥 뜯었던 장본인이든 그 옆에 드러누웠던 난민 여성이든 – 이미 우린 돈을 뺏겼고, 동생의 눈엔 습기가 가득한데, 매머드는 다 죽었는데, 이제와 이름을 안다 해서 뭐가 달라지겠냐고.

8.
휴학을 하고 여행을 다녔어. 여수와 통영, 부산과 강릉. 주위엔 조금 쉬고 오겠다 말했지만 실상은 빠져죽을 곳을 찾아 헤맨 거였어. 몇 푼 디지 않는 돈을 들고 사방을 돌아다녔지만 어딜 가도 한국의 하늘은 뿌옇게 흐렸고, 어디든 사람이 빼곡했지. 드넓은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면 웬걸 괜시리 목이 탔어. 포카리를 연신 퍼마셨지만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어. 끊임없이 목이 탔고, 그 이상으로 오줌을 쌌어. 의외로 배는 고프지 않았어.
하루의 삼분의 이 이상을 차 안에서 보내면 어떤지 알아? 스스로가 자동차의 부품인 것처럼 느껴져. 내 손이 기어나 핸들이, 등가죽은 시트가 되버린 것 같아. 난 여행 내내 차 안에서 잠을 잤고, 차에서 밥을 먹었고, 차를 몰고 이동했고, 차 안에서 바다를 바라봤어. 팔다리를 쭉 펴지도 못하는 좁은 운전석이 내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졌어. 어느 곳이든 코로나가 기승이어서, 창밖 풍경이 아무리 바뀌어도 차 안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 바이러스는 차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바리바리 돌아다니는지.
어느 밤을 기억해. 난 목 언저리까지 바닷물에 잠긴 채였어. 아직 봄이었고 물은 차가웠지. 미끄덩한 무언가가 정강이를 스쳐갔어. 그런 상태로 한참동안 눈앞의 밤을 응시했어. 몸은 얼어붙었고, 수면은 오르락내리락 했고, 이미 기어나 핸들이 되어버린 수족엔 도통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구태여 힘을 주기보단 파도의 움직임에 몸을 기댔고, 주기적으로 바닷물이 입에 들어갔다 나왔고, 찝찔한 맛이 목구멍을 비집고 들어왔고, 그 찝찔함이 꼭 누군가의 노폐물 같아 찝찝했고, 낮에 비하면 밤은 왜 이렇게 길고도 깊은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밤은 끝간데 없었고, 점점 물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이었고, 입술이 덜덜 떨렸고, 그래서 잠시나마 빙하기를 살아갔을 매머드나 동굴곰 따위를 떠올렸고, 그들에겐 하나같이 덥수룩한 털이 있었겠지, 그래서 추위를 견딜 수 있었겠지, 내 몸엔 그런 털이 없으니까 이렇게 추운걸까, 문득 외로움이, 아니 부끄러움이었나, 눈앞의 바다와 밤하늘처럼 딱 구분가지 않는 어떤 비감이 차올랐고, 그러거나 말거나 해변에선 몇 명이서 떠들썩하게 술자리를 벌였고, 이윽고 하늘에 폭죽이 터졌고, 폭죽은 소리에 비해 볼품없었고, 그런데도 초록색, 빨간색, 노란색 불꽃에 눈을 뗄 수 없었고, 물은 한층 깊어져서 인중까지 차올랐고, 어지럽다고 해야하나 아님 졸리다고 해야하나, 잘은 모르겠지만 세상이 아뜩해지는 느낌, 내 몸 무게가 한결 가벼워진 느낌, 그런 느낌만이 선연했고, 슈우욱 펑, 하고 몇 번 더 불꽃이 터졌고, 불꽃이 둥글게 퍼질 때마다 마치 성냥팔이 소녀처럼 무수히 쌓인 내 때를 겹쳐보았고, 슈우욱 펑, 파리의 잔상, 슈우욱 펑, 에펠탑과 디즈니랜드, 누군가 죽고싶다, 죽고싶어, 하고 속삭이는 소리, 거기 뭐해요, 뒤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지만 잘 들리진 않았고, 나와요, 위험하니까, 그래 나가야지, 슈우욱

마지막으로 때를 다 벗겨내야지. 그런 생각이 든 건 폭죽과 디즈니랜드의 퍼레이드가 겹쳐보인 탓이었을까. 제대로 못 다 한 무언가를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오래도록 몸을 씻으며 마지막 행선지를 정했어.
환상의 나라 에버랜드로.

9.
비수기의 에버랜드는 한산했어. 롤러코스터는 운행하지 않았고, 보고 싶었던 퍼레이드도 그 날은 예정에 없었어. 이국적인 건물들과 한산함이 맞물려 놀이공원이라기 보다는 외국의 어느 마을에 온 기분이었어. 곳곳에서 꺄아악, 하고 기분 좋은 비명이 울려 퍼졌지만, 난 좀체 놀이기구를 탈 마음이 들지 않았어. 핫도그를 하나 들고 회전목마나 장미정원 같은 장소를 왔다 갔다 했어. 디즈니랜드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이곳도 별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회전목마, 더블 락스핀, 허리케인, 로데오, 에버랜드는 넓었고, 도처에 놀이기구가 있었어. 대충 훑어보고 나니 벌써 서너 시더라. 더 이상 볼 곳도 없는데… 시간도 지났겠다 이제 돌아갈까 생각했지. 혼자 손에 커다란 지도를 들고 더 갈 데가 없나 찾아보는데
로스트 밸리
다섯 글자가 눈에 들어와 박혔어. 참 멋진 이름이구나. 그러고보면 주위 사람들이 하나같이 언덕 아래로 향하는 중이었지. 아래는 탈 것도 없는데. 아, 다 이 로스트 밸리로 갔구나. 이곳을 끝으로 에버랜드를 떠나기로 했지.
잊혀진 계곡, 걸으며 이름에 대해 생각했어. 뭘 잊었을까. 아니, 애초에 뭘 하는 곳일까. 뭐길래 고작 놀이기구에 저런 성대한 이름을 붙여줬을까. 갈수록 주위에 사람이 불어나는 기분이었어. 10분 쯤 걸었을까, ‘Lost Valley’라고 적힌 간판이 눈에 보였어. 그 앞에 선 직원에게 여긴 뭐하는 곳이냐 물었지. 사파리 투어처럼 버스를 타고 동물원 도는 거예요. 사파리와 동물원, 이 두 단어 사이의 갭은 무엇인가. 안에는 길게 줄을 섰어. 그냥 돌아갈까 하다가, 그래, 여기까지 와서 아직 하나도 안 탔는데, 하나는 타고 가자. 하고 뒤에 줄을 섰어. 30분 정도 기다렸을까, 겨우 버스에 탈 수 있었어. 철창과 호랑이 줄무늬, 확실히 사파리의 향이 물씬 풍기는 버스였지. 문득 종일 한 번도 앉지 않았다는 게 기억이 났고, 여태 차에 앉아서 지낸 시간이 너무 길어서 다리가 피곤했고, 어쩐지 피곤하더라, 어서 타서 앉아야지, 그러나 실제로 탔을 땐 잠시 우뚝 서서 멈출 수밖엔 없었어. 바로 눈앞에
매머드가 앉아있었거든.

10.
그녀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흰 원피스를 입고 있었어. 소매 아래로 털이 북실북실한 두 앞발이 보였어. 당연히 모조품인 줄 알았지. 자연스레 코를 씰룩거리는 걸 보고서야 와, 진짜구나 싶더라. 앞에 앉은 꼬맹이들이, 엄마, 저거… 하고 검지로 그녀를 가리켰고, 엄마는 애 손을 붙잡고 그녀를 못 보게 했지. 애들이 봐선 안 될 뭐라도 되는 것처럼. 비수긴데도 버스 안은 가득 찼고, 난 유일하게 빈 그녀 옆자리로 갔어. 그녀가 날 흘깃 보더라고. 내가 먼저 말을 걸었어. 저기 혹시
진짜 매머드신가요?
그녀는 날 빤히 쳐다봤어. 네, 그런데요? 목소리가 무척 우아했어. 아니, 여긴 어쩐 일로… 그녀는 보러왔다고 말했어. 무엇을 보러왔는지, 어디서 보러왔는지는 일체 생략한 채로. 아, 그러시구나… 그 뒤로 우린 말이 없었어. 어색한 정적. 갈색 탐험복을 입은 가이드가, 안녕하세요, 하고 침묵을 깼어. 어울리지 않는 요란한 목소리였어. 저는 오늘 우리 대원들과 함께 여행을 떠날 탐험 대장, 샘이라 하구요. 글쎄, 한국계 미국인인가, 왜 이름이 샘이지, 난 잠시 그런 생각을 했어. 샘은 아랑곳 않고, 제가 하나, 둘, 셋 하면 출발, 하고 외쳐볼까요? 하나, 둘, 셋- 하고 외쳤어. 물론 화답은 돌아오지 않았어. 한 번 더 할게요. 힘차게 하나, 둘, 세엣!
힘없는 추울바알과 함께 버스는 출발했어. 매머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창밖만 바라봤어. 지금 옆에 보이는 친구들은… 옆으로 대머리 황새가 보였어. 앞자리에 탄 아이가 고개를 쑥 내밀었어. 그 밖에 낙타와 산양, 알파카가 차례로 지나갔어. 아이들 놀라는 소리, 연인의 웃음소리, 카메라 소리 등등으로 버스는 시끌벅적했어. 누구보다 우리의 탐험대장 샘이 가장 호들갑을 떨었지. 나와 매머드만이 쥐죽은 듯 조용하게 앉아있었어.
버스는 동굴로 들어갔어. 누구냐. 아, 저는 탐험 대장 샘입니다. 동굴 벽에 조악한 영상이 떠올랐어. 정체모를 남성의 목소리가 동굴 벽을 울렸어. 너희는 인간이 아니냐. 네! 맞습니다! 샘이 답했어. 대답과 약간 어긋난 타이밍에 내래이션이 흘러나왔지. 수천년 전 우린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이 강해져 우릴 괴롭히기 시작했다. 동굴 벽엔 인간이 동물을 사냥하는 벽화가 떠올랐다 사라졌어. 결국 이곳, 로스트 밸리에 머물게 된 것이다. 아이들이 왁자하게 웃었어. 그러거나 말거나
난 죽음을 상상했어. 그래, 동물도 감정을 느끼겠지. 여기 살아가는 동물들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 묻어줄까, 아님 화장할까. 시체를 박물관이나 연구소에 팔아버릴까? 동물학자들이 낙타와 황새의 시체를 조각내는 영상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재생됐어. 낙타를 부검대 위에 올리고선 배를 갈라. 내장을 주루룩 빼내. 위생 장갑이 피 범벅이 돼. 남은 시체를 포르말린에 푹 절여 박제하는 거야. 그 과정 내내 낙타의 낯빛은 한결같이 밋밋해. 그래서 꼭 죽은 게 낙타가 아니라 나 자신 같아.
버스는 동굴을 나왔어. 이제부터 덩치가 아주 커다란 코끼리 친구들을 만나러 갈 거에요. 샘이 말했어. 양옆으론 길게 대나무 숲이 이어졌어. 버스는 느리게 달렸지. 코끼리 한 마디에 버스에 탄 사람들 모두가 기대를 품은 게 살풋하게나마 느껴졌어. 곧이어 대나무 숲이 끝나고, 멀찍이 코끼리가 나타났어. 과연
그 엄마에 그 새끼구나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옆 자리의 매머드와 비슷한 생김새였어. 갈색 털이 없어 민둥한 회색 살거죽이 보인다는 것만 빼면 빼다 박았다, 라고 해도 아깝지 않았어. 샘은 각각의 이름을 불러주었어. 바로 앞에 있는 친구가 우다라인데요, 이제 열 두 살인 친구예요. 하루에 먹는 풀의 양만 약 백 킬로그램이구요. 싸는 응가 양만 약 오십 킬로에 달하는 대단한 친구입니다. 저 멀리 있는 친구는 하티인데요, 한동안 사춘기가 와서 빗자루를 부러뜨리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근데 이 두 친구보다 놀라운 친구가 하나 있는데요. 말하는 코끼리로 유명한 코식이 한 번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샘은 코끼리들을 보며 설명을 이어나갔지만, 난 별로 흥미가 동하지 않았어. 그보단 매머드의 반응이 궁금했지. 흘깃 옆을 봤어. 동족과 만났으니 꽤 기쁘겠지, 하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어. 그녀는 다소 당황한 눈빛으로 우리 안의 코끼리를 살펴보다가 돌연 내게 물었어.
이 아이들은 뭘 잘못해서 여기 있는 거죠?
잠시 벙 쪘어. 아니, 그냥… 여기 살아요. 이런데서 산다구요? 그 말을 듣고 우리를 다시 봤어. 사생활이라곤 없는 개방된 공간. 덩치를 생각하면 몇 걸음 걷지도 못할 것 같은 좁은 흙바닥. 확실히 매머드의 입장에선 무슨 죄라도 지어서 들어왔겠다 싶더라고. 버스는 코끼리 존을 지나서 기린과 에뮤, 펠리컨을 스쳐갔어. 그러거나 말거나 난 옆자리의 매머드를 계속 바라봤지. 그녀는 가만히 창밖만 바라봤어. 긴 코와 눈동자만이 살짝 떨릴 뿐이었지. 투어는 금세 끝났어. 코끼리 말고는 뭘 봤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어. 모두 다 버스 바깥으로 나서는데, 오로지 매머드만이 그 자리에 계속 앉아있었어. 샘이 다가와 말했어. 다음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매머드는 코로 자기 이마를 쓸고는 일어났어. 난 버스 밖에서 그 모든 상황을 지켜봤어. 나 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버스 안 매머드를 진기하게 쳐다봤지. 꼭 코식이를 보는 눈빛이었어.
난 홀린 듯 그녀를 따라갔어. 그녀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 회전목마 앞에서 우뚝 섰어. 해는 많이 져서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어. 회전목마엔 밝게 불이 들어왔고, 그래서 그 앞에 선 매머드가 비현실적으로 다가왔어. 그녀는 갑자기 울기 시작했어. 뿌우우우, 코끼리의 울음소리가 꿈과 환상의 나라에 길게 울렸지.
그녀는 한참을 울었어. 난 우는 모습을 지켜봤어. 주위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깃거렸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어. 그녀가 우는 모습엔 당당한 구석이 있었고, 오히려 보던 사람이 민망해져 돌아갔어. 불현 듯 함께 부둥켜안고 울었던 에펠탑 아래 공원과, 그 아래서 넘겨받았던 뜨거운 열기 같은 게 기억이 났어. 스으윽, 그간 겪었던 일이 스쳐가면서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나도 울고 있었어. 주위엔 사람이 더 많아졌지만, 누구 하나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았어. 그만큼 매머드의 울음엔 숭고한 기색이 담겨 있었겠지. 난 그녀에게 다가가 꼭 끌어안았어. 부드러운 털과 후덥한 열기, 일순 봄이 끝나 여름이 찾아온 성 싶었어. 난 그녀의 품에 안겨 연신 눈물을 흘렸어. 눈물과 털 냄새가 합쳐져 포근한 냄새가 올라왔어. 그 속에서 난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렸지.
스위스로 가세요. 스위스로…

11.
요새도 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 세숫대야에 고갤 박고서 저 멀리 스위스를 떠올려. 알프스 정상에 쌓인 만년설과 천천히 흘러내리는 빙하, 빙하가 깎아 만든 U자곡, 그 아래서 약물을 꽂고 죽어가는 나 스스로의 모습이 천천히 흘러가. 난 나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저렇게 조형해 봐. 죽기 직전엔 이런 자세일까, 표정은 이러겠지, 하면서 말이야.
그러다 문득 이름모를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 털이 북실한 매머드. 그녀는… 어떻게 됐을까. 그녀도 지금쯤 스위스에 도착했을까. 상상 속 그녀는 만년설 위에서 여전히 울고 있어. 특유의 당당한 자세로, 우뚝 서서 줄줄 눈물을 흘리는 거야. 그런 상상을 할 때면 내 눈시울도 함께 붉어져.
난 끝내 죽지 못했어. 내가 무슨 자격으로 죽을 수 있겠어. 나도 누군가에겐 큰 상처를 줬을 텐데. 그 탓에 죽은 동물도, 죽은 사람도 있을 텐데, 어떻게 아무런 부끄럼 없이 죽을 수 있겠어. 다들 안락하지 못하게 죽어가는 와중에 나 혼자 안락하게 죽을 생각을 하겠냐는 말이야.
대신 이렇게 글을 써. 모든 사람이 서로 상처만 준다면. 한 명쯤은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딱 한 명쯤은 같이 아파해줘도 괜찮지 않을까. 나 하나 정도는 매머드를 부둥켜안아야지 않을까… 여전히 코로나는 기승이고, 코끼리는 우리 안에 있고, 여전히 파리와 서울 시내에선 사람들이 안락하지 못하게 죽어가고 있겠지만, 나 하나가 운다 해서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난 한없이 부끄러워 눈물을 훔쳐. 참 지독하고 지독한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