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되고 싶은 ‘야후’들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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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전수아 기자
일러스트=전수아 기자
일러스트=전수아 기자

<걸리버여행기>, 어릴 때 만화로 봤던 사람도 있고, 좀 더 커서 ‘청소년을 위한~’ 버전으로 읽어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좌우지간 이 이름을 듣고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 이름이 어쩌다가 이렇게 익숙해졌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짧지도 않고 제목도 평범한 이 소설은 어쩌다 이렇게 유명해졌을까?

동화 같지만, 동화일 수 없는 이야기
사실 <걸리버여행기>는 작가 스위프트의 동화 같은 상상력이 돋보일 뿐,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어린이가 알기에는 가혹한 현실을 교묘하고도 적나라하게 다뤘기에 대작으로 평가받는 소설이다.

걸리버는 사고와 우연의 연속으로 1~4부에 걸쳐 1) 작은 사람들의 나라, 2) 큰 사람들의 나라, 3)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 4) 말들의 나라 를 방문한다. 설정부터 비현실적인 각각의 나라들은 저마다 기괴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자식은 부모에 은혜를 느낄 필요가 없다’, ‘이 세상은 태어난 것만으로 불행한 곳이다’와 같이 일반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명제들이 마땅하게 여겨지는가 하면, 사색에 빠져 시종이 귀를 두드려줘야 겨우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괴하고 비상식적이라는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장면들이 단순히 걸리버의 여행을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작품에 배치된 것은 아니다. 작가는 여행의 형태로 독자를 낯선 세계에 던져 넣음으로써 자연스레 독자가 이제까지 살아온 세계를 의심하고 반성하게 만든다. 정치, 종교, 법률, 심지어는 인간 자체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는 이러한 의문점들이 <걸리버여행기>의 매력이다.

정치, 종교, 학문, 인간, 법률, 역사…
전 분야에 걸친 광범위한 회의와 풍자

특히 3~4부에 걸친 걸리버의 기록은 공격적인 풍자의 연속이다.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펴낸 책’이라는 작품의 수식어를 납득하게 한다.

3부에서 걸리버는 고고한 사색에 잠긴 사람들의 나라에 떨어진다. ‘수준 낮은 걸리버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이들은, 무식하다고 여겨질까 단순하고 실용적인 해답을 기피한다. 어떤 벽도 ‘실용적인’ 직각이 되지 않게 하느라 다 쓰러져가는 집을 짓고, 새로운 시도랍시고 멀쩡한 농장을 파괴한다. 나라 전체가 황폐해지고 사람들이 옷과 식량을 잃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 특권의식에 젖은 현학적 태도에 대한 풍자다. 걸리버는 이들을 ‘남이 발명한 것을 도용하는 유럽의 학자들과 다르다’며 옹호하기도 하지만, 책을 읽는 독자는 이미 이 미친 듯한 열정의 과학자들과 발전 없는 유럽의 학자들 중 어느 한 쪽도 칭찬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진 후다.

이런 식의 비판은 소설이 진행될수록 노골적이다. 4부에서 말의 형상이지만 인간 이상의 지성을 가진 ‘휴이넘’과 걸리버가 나누는 대화는 ‘폭력적’일 지경이다.

가령 휴이넘이 그 나라에는 없는 전쟁의 원인이나 동기를 묻자, 걸리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일에 대한 의견의 대립으로 일어나는 무섭고 잔인하고 긴 사건은 없을 것’이라며 담담하게 대답한다. 국민의 분노를 억누르거나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동맹국이더라도 도시가 점령하기 편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등등의 보잘것없는 이유로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에 휴이넘은 ‘야후(말들의 나라에서 이성 없는 인간을 가리키는 말)는 이성을 가지지 않았으며 다만 우리의 악행에 걸맞는 자질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률이 어떻게 사람을 파멸로 이끄는가에 대한 질문도 이어진다. 이에 걸리버는 ‘우리 사회에는 돈 때문에 하얀 것을 검다고, 검은 것을 하얗다고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문용어를 사용하는 변호사라는 존재가 있다’, ‘이들은 자신의 업무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가장 무식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다’며 그리 대단하지 못한 법률의 실체를 이야기한다.

휴이넘의 악의 없는 질문과 걸리버의 대답이 과격한 언사가 아님에도 잔인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이 책을 읽는 어느 나라의 누구도 이 문제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위프트는 사람들을 가장 괴롭게 하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조용히, 때로는 조용해서 더 아프게 드러낸다.

“인간은 과학이랍시고 쓸모없는 궁리에 차 있는지 모르고, 사회 질서를 지키겠다고 만든 법이 모호하게 숨을 구멍만 규정하는 꼴인지도 모른다. 유치하고 사소한 싸움에 지나지 않는 것을 정치라는 대단한 이름으로 불러왔을 뿐이다.”

끊임없이 제기되는 이런 논점들은 스위프트의 인간혐오를 이해하게 한다. 이 세상이 어쩐지 지긋지긋하게 느껴지고, 차라리 걸리버를 따라 말 흉내를 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걸리버여행기>는 독자에게 인간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인걸까?

여행기로 표현되는 ‘절대적 비절대성’
얼핏 이해하기 힘든 낯선 세계로의 여행기는 때로는 다른 이의 입을 빌려, 때로는 유연한 풍자로, 때로는 직접적인 비난으로 독자를 다양한 회의에 빠트린다. 그러나 작품 속 어느 것 하나도 쉬이 악하거나 쉬이 선하지 않았다. 어느 나라에서 통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을 통해 이를 비판했다면, 다른 나라에서는 통속을 견제하느라 실속을 따지지 못하는 과학자를 통해 그 반대를 고려해야 했다. 그 나라 사람들은 나름의 전통으로 각기 다른 가치를 품어 왔고, 그때마다 독자는 새로운 의문점을 얻었을 뿐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독자가 느낄 수 있는 혐오감에 대해서도 조금 다른 관점이 있다.

인간보다 나아보이는 ‘휴이넘의 나라’가 반드시 아름다운 것은 아니며 독자를 실망시키는 ‘야후의 나라’가 반드시 경멸의 대상은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평생을 야후의 나라에 살아온 독자는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이 세계에 대한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그가 어떤 지점에서 분노하고 어떤 지점을 지나치는지는 그가 살아온 삶에 지대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절대적일 수 없다. 이러한 ‘절대적 비절대성’은 거인국을 떠날 때 걸리버의 깨달음에서도 나타난다.

거인국에 간 걸리버는 먼저 소인국을 방문했음에도 거인국 사람들의 시선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는 평소 우습게 여겨왔던 새나 쥐, 원숭이 같은 동물들에게 생명을 위협 받고, 거대한 사람들에게는 성심껏 예의를 차려도 웃음거리가 된다. 처음에는 이 모든 것을 모욕으로 여기던 걸리버는, 곧 자신이 거인이었다면 자신조차 누군가를 그런 시선으로 보게 되었으리라 인정하고 ‘월등히 높은 대상 앞에 명예나 우위를 지키려는 노력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반성한다. 오랜만에 만난 보통 인간들을 보잘것없고 형편없는 생물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눈에 보이는 거대한 것들에 사로잡혀 자신의 작은 모습을 애써 못 본 체 해왔음을 깨닫기도 한다.

작품 내에서 몸의 크기로 표현되는 상대성은 사실 인식의 상대성 그 자체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우리가 숭배하거나 손가락질하는 모든 것, 당연하게 여기거나 드물게 여기는 모든 것은 이제까지 살아온 ‘상식적 세계’의 인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작가 스위프트가 정치, 종교, 학문, 인간, 법률, 역사에 걸친 광범위한 비판을 여행기 형태로 풀어낸 의도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작가가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말하지 않아도 독자는 걸리버의 여행을 통해 성장한다.

그러니 스위프트의 광범위하고 날카로운 풍자를 통해 ‘무조건’의 잣대를 잃어보자. 절대적이거나 어쩔 수 없다고 믿어왔던 세상의 못난 면모를 다시금 괘씸하게 여겨보고, 훌륭하고 당연하다고 여겼던 가치들을 의심해보자. 어쩌면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고 세상 구석구석에서 뚜렷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작가의 방식이야말로 독자가 책을 덮고 기억해야 할 주제의식이자 <걸리버여행기>가 ‘고전’이 된 이유일 것이다.

안재영 기자
anjaeyoung@g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