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를 발견했다 (제1회 광주과기원 문학상 – 단편소설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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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광주과기원 문학상 공모 수상작: 단편소설 부문 가작

산타를 발견했다

이승필(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

그건 이브날 밤의 일이었습니다. 아빠랑 엄마는 쥐도 새도 모르게 자고 있었겠지요. 그래도 너무 화내진 마세요. 아빠랑 엄마는 초보니까요. 제 수준의 베테랑 크리스마스인은 돼야 어두운 방 안에서도 잠을 안 자고 버틸 수 있는 법이랍니다.

그러고보면, 아빠는 베테랑이란 말을 참 좋아합니다. 소희야.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단다. 왜? 그래야 베테랑이 될 수 있거든. 소희야 소희야. 공부, 공부를 열심히 해야한단다. 왜? 그래야 베테랑이 될 수 있거든. 소희야, 소희야, 소희야… 공원에 놀러갈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는 똥을 쌀 때조차 아빠는 베테랑을 찾습니다. 그럴 때면 전 아빠에게 묻곤 합니다. 베테랑이 뭔데? 베테랑은

산타

같은 사람이란다. 산타? 그래, 산타. 존재 자체가 선물 같은 그런 사람이지. 그러고 나서 아빤 산타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산타 할아버지께선 지구에 사는 모든 아이들을 지켜보고 계신단다. 그러다가 나쁜 짓을 한 아이나 우는 아이를 보면 체크 하시는거지.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의 이름이 적혀있는 산타 수첩에다 말이야. 상상해 보렴. 세상 모든 아이들의 이름이 적힌 수첩은 얼마나 두껍겠니? 백 페이지. 아니야. 그럼 이백 페이지? 아니야, 아니야. 소희야. 그건 무려 천 하고도 육백 사십 삼 페이지나 된단다. 그건 조금 충격이었습니다. 그 때까진 제가 읽은 책 중 가장 두꺼운 책이 겨우 오십 칠 쪽이었거든요. 그리고 말야, 소희야. 할아버지께선 크리스마스 이브날 밤이면 한 집, 한 집 돌면서 산타 수첩을 펼쳐보신단다. 천 하고 육백 사십 삼 페이지 짜리 수첩을 말야? 그렇지. 왜? 체크된 아이는 선물을 받을 수 없거든. 그래? 그렇, 단다. 왜? 아빤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게 인생이란다. 소희야.

인생이라니. 그 얘기를 처음 들었던 일곱 살 무렵엔 너무 무거운 단어라고 생각했습니다. 천 하고도 육백 사십 삼 페이지짜리 수첩만큼이나 말예요. 한편으로 어른이 된다는 건, ‘그게 인생이란다’라는 말을 쓸 수 있게 되는 거구나 싶었습니다. 그 뒤로 ‘인생’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면 어른 세계로 통하는 문지방을 밟는 느낌이 들면서, 짜릿, 하고 전기가 올라옵니다. 어쨌든지 간에

요사이 전 칠 년 산 아이에서 구 년 하고 한 달을 산 아이가 되었고, 드림 유치원 햇살반 김소희에서 일학년 삼 반 십 오 번 김소희로 바뀌었고, 십 이 센티미터나 더 자라서 백 이십 칠 하고도 0.6 센티미터가 남게 됐고, 무려 백 오십 삼 쪽 짜리 책을 다 읽어 버렸고, 인생이란 단어가 조금은 친숙해졌고, 당근이랑 파도 잘 먹게 됐고, 무엇보다도

베테랑 크리스마스인

이 되어버렸습니다. 고작 이 년 사이에 말입니다. 어젯밤 엄마한테 물어보기 전까지만 해도 한 이 년은 더 걸릴 줄 알았어요. 엄마, 나 이제 베테랑이야? 그럼. 소희는 베테랑이지. 아빠는 일만 시간이 지나야 된다고 하던데? 소희는 한창 클 나이잖니. 그렇구나. 그렇, 단다. 아무튼 전 그렇게 베테랑 크리스마스인으로서 인정을 받았고

첫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잠을 꾹 참고 앉아있었던 겁니다.

 

“할아버지.”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잘못 들은 거 겠지. 잘못 들은 걸거야. 잘못, 들은 거여야만 해. 종민아, 절대 들키면 안 된다. 저 멀리서 팀장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이 프로젝트 추진하는데 자그마치 101억이 들었어. 알겠냐? 절대, 들키면, 안 돼.

“할아버지!”

침대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보니 누가 내게 다가오는 중이었다. 천천히. 도망가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내 발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저예요.”

“누구… 세요?”

“저라니까요.”

글쎄, 누구냐니깐. 되묻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가 내게 좀 더 다가왔다. 여자아이였다.

“저 몰라요? 할아버지.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알지 그럼.” 내 입에서 자연스레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한 말이 아니었다. 혓바닥이 멋대로 한 짓이었다. 혓바닥 이 새끼야

“그럴 줄 알았어요.” 아주 잘했어. 혓바닥 씨 없었으면 어쩔 뻔 했어, 정말. 저한테 맡겨 두시라니까요. 혓바닥이 말했다. 이십 삼년을 같이 살았는데, 절 너무 못 믿으시는 거 아녜요? 미안해. 미안해. 자, 그럼 혓바닥 씨, 저 애를 어서 침대로 돌려보내. 알겠습니다. 혓바닥이 모종의 계획을 실행하려던 그 순간,

“어?” 아이의 입에서 불길한 소리가 새나왔다.

“수첩은 어쨌어요?”

수첩이 뭐지. 이마에 땀이 찼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 정말이지 애들이란, 왜 이렇게 쓸데없는 질문들을 하는지.

“요새는… 수첩을 안 쓴단다.” 이번에도 혓바닥이 멋대로 움직였다.

“시대가 좋아져서, 말이야. 스마트폰이면 충분하지.”

아이는 가만히 서있었다. 꼴깍. 침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할아버지 맞아요?”

“맞아.”

“그럼, 제 이름이 뭐게요?” 아이가 물었다. 올게 왔구나. 이제 곧 엄마를 부를거고, 엄마는 경찰을 부를거고, 나도 엄마를 부르겠지. 교도소에서. 내가, 어쩌다, 이런 집구석까지 들어오게 됐는지.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콧등을 타고 흘렀다. 니 이름이 뭔지 알게 뭐야. 어? 니가 수현이든, 지현이든, 정현이든, 설영이든, 희진이든,

“소희야! 빨리 자라!”

소희든 말이야.

 

알았어, 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산타 할아버지는 제 입을 막고는 그대로 안아 올리셨습니다. 순식간이었습니다. 쉿. 쉬잇. 가만히 있으렴. 할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습니다. 과연, 베테랑이란 이런 거구나 싶을 정도로 조용하게. 아빠도, 엄마도 전혀 눈치채시지 못한 기색이었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모험을 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할아버지는 현관을 나와 바로 계단을 따라 내려가셨습니다. 할아버지. 제가 속삭였습니다. 저 맨발인데요. 할아버지는 우뚝 멈추시더니, 다만, 쉿, 쉬잇, 하고 쇳소리를 내셨습니다. 전 입을 다물었습니다.

집이 점점 멀어져갔습니다. 할아버지는 절 드는게 힘드신지 두어번 고쳐 안으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흐읍, 후우 하는 숨소리와 함께 가로등불이 오르내렸습니다. 꼭 가로등이 숨을 쉬는 듯 했습니다. 전 가로등에게 손을 흔들어주었습니다. 갔다 올게. 흐읍, 후우. 가로등이 대답했습니다.

얼마나 갔을까요? 할아버지는 차 문을 여시곤, 절 조수석에 태우셨습니다. 전 바로 차 기어를 만져봤습니다. 와, 이게 루돌프인가. 생각보다 보통 차 같은데. 다음은 핸들도 돌려봤습니다. 뻑뻑해서 잘 안 돌아갔습니다. 흠. 이렇게 하면 변신하는게 아닌가? 세 번 정도 더 밀어보고 나서도 차는 변신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운전석에 앉은 할아버지 얼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니, 그런데 이게 뭐람. 산타 할아버지가 아니라 웬 아저씨가 앉아있는게 아니겠어요? 뭔가 잘못돼도 한참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 팔짱을 끼고

뭐에요. 할아버지가 아니잖아요.

하고 화냈습니다. 할아버지는, 아니 아저씨는 백미러를 한 번 봤다가, 절 쳐다봤다가, 고개를 돌려서 차 뒤를 봤다가, 손에 머리를 파묻었다가, 진짜 미치겠네라고 했다가, 아저씨 미쳤어요? 물어보니까 화들짝 놀랐다가, 손톱을 물어 뜯다가, 엄마가 손톱 물지 말랬어요, 그러니까 손을 엉덩이 아래에 넣었다가, 어느샌가 다시 꺼내서 물어 뜯다가… 보고 있자니 웃음이 샐 것 같았습니다. 전 꾹 참고서

아저씬 누구에요? 물어봤습니다. 최대한 심각한 표정으로요.

나? 나는 아빠 친구란다.

아빠 친구면 아빠 불러도 돼요?

아니, 아니. 사이가 별로 안 좋아서.

그게 무슨 친구야.

그런 친구도 있는 법이야.

이거 혹시 납치 아녜요?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팔뚝에 소름이 올라왔습니다.

물론 아니지.

거짓말 치지 말아요.

아니야, 아니야. 학교에서 납치가 뭐라고 가르치던?

누가 사탕주면서 따라오라하면 마구 소리를 지르라고 했어요.

내가 너한테 사탕을 줬니?

아뇨.

그럼 따라오라고 했니?

그것도 아니죠.

그럼 이건 납치가 아니지.

그렇군요. 그렇, 단다. 확실히 아저씨 말은 일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궁금증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아저씬 대체 누구에요?

그러자 아저씨 표정이 꼭 해피처럼 변했습니다. 해피는 우리 집 강아지입니다. 아니, 정확히는 우리 집에 올 뻔 했던 강아지라고 해야겠네요.

소희야 얘 이쁘지 않니? 엄마가 내민 휴대폰 속엔 강아지 한 마리가 들어있었습니다. 하얀 털이 복실복실하니, 글쎄, 강아지라기보단 차라리 한 뭉치 먼지같이 생겼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강아지는 혀를 살짝 빼 문 조금 난처한 표정이었습니다. 얘 우리 집에서 기르면 어떨 것 같아? 엄마는 이어서 제게 물었습니다. 이름이 뭔데? 해피야 해피. 애써 해피와 함께 사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같이 밥을 먹고, 같이 학교를 갔다가, 이거 재밌더라, 얘기도 좀 나누고, 밤이 되면 부둥켜 앉고 자는. 썩 나쁘진 않아보였습니다. 다만, 해피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전 대답했습니다. 좋은데,

해피도 괜찮데? 어… 어, 그럴거야. 아마. 물어봤어? 그럴… 걸? 전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엄마는 핸드폰을 들고 방을 나갔습니다.

소희 아빠, 이 소장이 얼마전 집에 강아지를 들였대. 근데 애가 냄새만 맡아도 기분이 좋아진다더라? 뭐야, 그게. 마약이야? 나도 모르지. 하여튼 우리 집에도 개 한 마리 들이는게 어때? 우리… 집에? 어. 우리 집에. 개는 어디서 나서? 이거 봐봐. 얘야. 귀엽네. 그렇지? 분양하는 사이트가 있더라고. 그럼 누가 기르던거야? 그렇긴한데, 아직 2개월밖에 안됐어. …우린 아파트라서 힘들지 않을까? 에이, 이 소장도 아파트 살아. 이 소장네랑은 다르지. 우리는 애도 아직 어리잖아. 그러니까 더 좋지, 소희도 좋다고 했어. 왜 싫어? 아니, 뭐, 싫진 않은데… 그럼 데려온다? 당신은 참… 참, 뭐. 아니야. 하려던 말 해봐. 아니라니깐. 뭐냐고. 좋게 말 할 때 대답해. 하… 듣고 싶어? 어. 당신 진짜

산타… 야. 아저씨가 말했습니다. 거짓말, 이라고 말하려했지만 아저씨는 여지껏 본 중 가장 진지한 표정이었습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게 꼭 말해선 안되는 비밀을 말해버린 듯 말입니다. 자세한 사정은 말해줄 수 없지만, 난 진짜 산타란다. 정확힌, 산타 인턴이지. 아저씨가 덧붙였습니다.

인턴이요? 그게 뭔데요?

소희가 몇 학년이지?

이학년이요.

그럼 인턴은 유치원생 같은 거란다.

그제야 모든게 이해가 갔습니다. 산탄데 천 육백 사십 삼 페이지짜리 수첩이 없는 것도, 루돌프가 사슴이 아니라 보통 차인 것도, 행동 하나하나가 베테랑답지 못하게 어리숙한 것도. 그러니까 아저씬

산타 할아버지의 아들이군요. 제가 물었습니다. 아저씬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가, 그렇게 볼 수도 있으려나, 라고 말했습니다. 아저씬 여전히 힘이 없어보였습니다. 베테랑으로서 응원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괜찮아요 아저씨. 처음하면 누구나 다 그래요. 그래, 고맙구나. 잠깐 전화 한 통만 해도 괜찮겠니? 물론이죠. 신호음이 몇 번 울렸습니다. 주위는 고요해서 신호음마저 시끄럽게 들렸습니다. 곧이어 낯선 아저씨 목소리도 더해졌습니다.

팀장님, 걸렸습니다. 낯선 아저씨의 호통이 이어졌습니다. 산타 아저씨 얼굴이 창백했습니다.

네… 아뇨. 여자아이입니다. 9살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일단, 데리고 나왔습니다. 네. 죄송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통화가 끊기고, 아저씬 허공에 나지막히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하, 씨발.

“에라이, 병신 새끼야. 이게 몇 명 모가지가 걸린 일인줄 알아?”

“죄송합니다.”

“디퓨저는. 디퓨저는 잘 놓고 왔어?”

“네.”

“하… 일단 걔 데리고 나 있는데로 와.”

“알겠습니다.”

통화가 끊겼다.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하, 씨발.”

왜 되는게 없지. 돌이켜보면 인생은 항상 내게 과분한 선물들을 안겨줬다. 내 생일엔 부모님의 이혼을 줬고, 수능날엔 장염을, 설날엔 할아버지 장례식을, 돈벌러 나간 상하차에서 허리 디스크를, 대학에선 10배로 불려주겠다며 200 빌리고 잠수해버린 친구를… 고맙다 인생아.

그러다보니 난 늘 산타를 소망했다. 단 한 번이라도,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산타에게 선물을 받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산타란 결국 부정(父情)의 소산이다. 누구나 선물을 주는 사람이 아빠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자라는 법이니까. 그러나 초등학교 때 이미 아빠를 잃은 내겐 해당사항이 없었다. 결국 난 단 한 번 선물을 받아보지 못하고 사회에 던져졌다. 사회는 산타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날 받아주지 않았다. 종민씨는, 뭐랄까, 현실감이 없는 것 같아요. 이건 면접 자리에서 들어본 말이다. 이유? 니 완전 또라이야, 알아? 이건 전 여친한테 차이면서 들은 말 같고. 애가 좀 음침해요. 이건 초등학교 담임이랑 상담할 때였나? 아무튼

난 산타를 묻어야만 했다.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신 차려, 폐급 새끼야. 인생은 제로섬 게임이야. 조금만 뒤쳐지면 바로 죽는거라고. 그 뒤로 난 뒤쳐진 사람들에게 모래를 뿌렸고, 앞선 사람들에겐 돌멩이를 던졌다. 선물은 무슨 얼어죽을 선물이야. 산타는 그렇게 잊어갔다.

야, 너 상하차 해 본 적 있다고? 선배와의 술자리에서 그런 질문을 들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럼 너 연구소로 한 번 가볼래? 연구소요? 국정원 소속인데, 그 쪽에서 택배일 해본 애들 필요하대서. 뭐 하는지 아십니까? 나도 몰라. 극비래. 그래도 괜찮은 기회 같더라. 그렇습니까. 다른 애들도 있는데, 너한테만 말해주는거야. 감사합니다. 역시, 인생은 제로섬 게임이었다. 아, 대신 내 얼굴에 먹칠하면 안된다.

소희를 힐끔 보았다. 그래, 아직 괜찮아. 연구팀에서 개발했단 약만 먹이면, 아직까진 돌이킬 수 있을거야. 돌이킬 수 없게 된 택배 기사 이야기가 머리를 스쳤다. 벌써 불행한 일을 생각하진 말자. 고개를 휘저어 잡생각을 떨쳐냈다.

“소희야, 아저씨랑 잠깐 어디 좀 갔다 오자.”

“어디요?”

“저기 뒷산 근처 있어.”

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소희 벨트를 매주고,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 크리스마스 새벽의 도로엔 차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차는 미끄러지듯 달렸다. 산에 가까워질 수록 마음이 무거워져 가는 듯 했다. 무겁다 못해 헛구역질이 나올 때 즈음, 소희가 물었다.

“근데요 아저씨. 씨발이 뭐에요?”

 

근데요 아저씨. 씨발이 뭐에요?

어… 아저씨도 모르겠네.

그럼 아저씨, 부동산이랑 불감증은 뭔지 알아요? 끼이익. 아저씨가 급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뭐, 라고? 부동산이랑 불감증이요.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한거니?

우리 아빠랑 엄마는 가끔 씨발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씨발롬아, 씨발련아, 이런 씨발, 등등. 그렇게 말하는 엄마랑 아빤 늘 화가난 상태였습니다. 도대체 씨발이 뭐길래 매번 말하면서 화를 내는 걸까? 어쩌면, 이 씨발만 해결하면 엄마 아빠가 싸우지 않게되진 않을까? 궁금증은 날로 커져만 갔습니다.

하루는 아빠한테 직접 물어봤습니다. 애들은 몰라도 된단다. 아빤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세상엔 애들은 모르는 비밀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로지 어른들만, 그 중 베테랑들만 전부를 알 수 있지요. 부동산과 불감증도 그런 비밀중 하나입니다. 씨발이 나오는 경우를 관찰한 결과, 그 앞뒤로 이 단어들이 유독 많이 튀어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씨발은 부동산, 불감증과 관련이 있는 단어가 분명했습니다. 부동산과 불감증이 뭔지 안다면 씨발이 뭔지도 알 수 있지 않겠어요? 그건… 확실히 그렇겠구나. 그래서 부동산이랑 불감증이 뭔지 알아요?

신호등에 빨간불이 걸렸습니다. 아저씨는 브레이크를 밟고 천천히, 천천히 제게 얼굴을 돌렸습니다. 눈꼬리랑 입술이 일자로 쭉 펴진 밋밋한 표정으로 말입니다. 거기에 가로등을 등져서일까요, 아저씨 얼굴이 아주 시커멓게 보였는데 꼭 아빠가 무서운 이야기를 해줄 때의 표정 같았습니다. 전 어깨를 조금 움츠렸습니다. 부동산이란 건 어쩌면 아주 무서운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조지 말로리라는 사람을 아니.

조지, 말로리요?

그래. 조지, 말로리.

누군데요?

에베레스트 산을 최초로 오른 사람이란다. 안타깝게도 산에서 끝내 내려오진 못했지만 말이야. 그의 시체가 아직도 에베레스트 북동릉 8138m 지점에 누워있지.

오싹한 기운이 등뼈를 타고 올라왔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더이상 듣고싶지 않았는데도, 왜요? 하고 묻는 입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건 1924년의 일이었어. 말로리와 그의 동료 어빈은 에베레스트 정상을 코앞에 두고 있었단다. 산소통이랑 음식도 충분했어. 도저히 실패할 것 같지 않았지. 말로리는 벌써부터 에베레스트를 정복했다는 쾌감을 느끼고 있었어. 어빈도, 아마 비슷했을거야. 그래서겠지. 둘은 긴장이 풀린 상태로 이야기를 나눴어. 말로리, 넌 어쩌다 에베레스트를 타게 됐니? 산 타는데 이유가 어딨어. 멍청아. 이 대화는 훗날 전세계의 모든 아이들에게 퍼지게 된단다. 조금 멋있게 각색돼서 말야. 하여튼, 그 때 까지도 둘은 정상에서 겪게 될 일을 예감조차 못하고 있었어. 그게 불행의 시작이었지. 정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제가 물었습니다. 듣고 싶어? 네. 정말? 정말요. 아저씨의 목젖이 한 번 내려갔다 올라왔습니다. 꼴깍, 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제 목에서 난 소리였는지 아저씨 목에서 난 소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정상에 도착한 말로리와 어빈은 충격에 빠졌단다. 그곳에서

부동산

을 보고 말았거든. 부동산이요? 그래 부동산.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면서, 가장 가파른 산이지. 또, 가장 빨리 자라는 산이기도 해. 에베레스트가 매년 5cm씩 커지는데 반해 부동산은 100m씩 자라거든. 아저씨, 선생님이 세상에서 제일 큰 산은 에베레스트 산이라고 하던데요? 아저씨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건 부동산이 아이들에게 알려주기엔 너무 위험한 곳이기 때문에 어른들이 지어낸 거짓말이란다.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산은 부동산이 맞아. 에베레스트의 정상에서도 부동산은 끝이 안 보일 정도니깐. 뭐야, 이게. 말로리는 털썩 주저 앉았지. 무리도 아니야. 말로리도 그 때까진 에베레스트 산이 세계 최고봉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거든. 어빈은 아예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고 해. 말로리가 물었어. 어빈, 우리가 이제까지 한 건 뭐지? 세상에서 두 번 째로 높은 산을 등반한 거?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어. 둘은 터덜터덜 에베레스트 산을 내려왔지. 고개를 땅 바닥에 박고선. 그러다가 그만, 크레바스를 발견하지 못한거야. 말로리는 그렇게 아직도 에베레스트 북동릉 8138m에 누워있단다.

그렇군요. 그렇, 단다. 아저씨의 이야기가 끝나자, 뭐랄까, 속이 후련했습니다. 부동산이 저런 거라면 엄마가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빠가 그릇을 던지는 것도 납득이 됐거든요. 하기야 조지 말로리 같은 사람도 버티지 못한걸 우리 엄마 아빠가 어떻게 버티겠어요?

그럼 불감증은요? 불감증은 말이지, 영어론 IPS라고 부른단다. IPS요? Igniting Persimmon Syndrome의 줄임말이지. 그게 뭔데요? 한국어로는 ‘불타는 감 증후군’이야. 1957년 애나 마틴이라는 사람에게서 처음 그 증상이 보고됐단다. 그날 애나 마틴은 시장에서 처음 보는 과일을 발견했단다. 이게 뭔가요? 감입니다. 맛있나요? 음… 과일 장수는 말꼬리를 흐렸어. 과일 장수도, 사실 이름 말고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거든. 감이란게 말이다, 소희야. 우리나라에서는 많이 먹는 과일이지만, 영국에선 여간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 아니란다. 뭐가 됐든 과일 장수도 잘 모르는 과일이라는 점에 호기심이 동한 애나 마틴은 곧장 감 세 개를 사왔어. 그리고 비극이 터졌지. 저녁을 다 먹은 다음, 그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감 하나를 꺼냈어. 처음엔 조금 떫은 맛이 났대. 그러더니 매운맛이 스멀스멀 올라왔지. 뭐야, 이게. 그녀의 마지막 한 마디였단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불에 타기 시작했어. 뒤늦게 소방관이 출동했지만, 이미 방 안엔 재만 날렸지. 아직까지도 감을 먹고 나서 몸에 불이 붙는 사람들의 사례들이 보고되곤 하는데, 그 이유는 밝혀내지 못했단다. 그럼 그게 바로… 그래, 소희야. 그게

불감증이야. 그렇군요. 그렇, 단다. 전 다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제야 엄마가 의자를 집어 던지는 이유가, 아빠가 30분동안이나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는 이유가 이해가 가는 듯 했습니다. 갑자기 불에 타는 질병이라니, 그건 확실히 화장실에서 나오고 싶지 않겠지요.

우린 그 뒤로도 한참을 더 떠들었습니다. 아저씨, 아저씨, 아빠가 산타는 산타 수첩을 들고다닌다는데, 천 하고도 육백 사십 삼 페이지 짜리 수첩 말예요. 사실이에요? 뭐, 그렇다 할 수 있지. 대단하네요. 전 아마 들지도 못할거에요. 아니야, 소희도 할 수 있어. 아저씨, 아저씨, 저희 지금 어디로 가는거에요? 음… 그러니까 베테랑을 만나러 가는거야. 그 사람도 산타에요? 그렇게도 볼 수 있으려나. 아저씨, 아저씨, 그거 알아요? 그거 있잖아요…

차가 산에 가까워졌습니다. 얼마전에 내린 눈이 살짝 녹아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가로등 수가 점점 줄었습니다. 저는 뭐랄까, 부동산에 가까워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그렇다고 잠시라도 눈을 뗐다간 크레바스에 빠져 죽고 마는. 산 아래 공터가 보였습니다. 이윽고 라이트 안에 웬 나이든 아저씨가 들어왔습니다. 츄리닝 차림에 등산화까지, 평범한 산 타는 아저씨 같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 가만히 있으렴.

알겠어요.

산타 아저씨는 긴장된 표정으로 산 타는 아저씨에게 향했습니다. 뒷모습이 꼭 에베레스트 정상을 앞둔 말로리 아저씨처럼 비장해 보였습니다.

 

먼저 뺨을 맞았다. 다음은 정강이. 그리고 턱. 코. 가슴. 다시 뺨. 정강이. 턱. 코. 가슴. 어? 아니지. 정강이지. 허벅진가? 어딜 맞는지 점점 긴가민가해졌다. 손은 멈추지 않았다.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마구잡이로 때릴 수 있는걸까. 내가 잘못하긴 했지만 말야. 뭐 벌레도 아니고 사람을. 팀장 정도 되면 인턴은 벌레로 보이는건가. 하기사 바퀴벌레의 아픔을 사람이 느낄 순 없는 법이지. 아니, 어쩌면 팀장뿐만이 아닐지도 몰라. 사람이란 원래부터가 타인의 아픔을 느낄 수 없는게 아닐까. 에베레스트의, 아니 그보다 높은 부동산의 차가운 공기가 등허리를 훑고 지나갔다.

참 나. 부동산은 뭐고 불감증은 뭐래. 정말이지 애들이란, 그런 뻔한 거짓말을 다 믿고 말야. 나도 참, 왜 그런 구라나 친건지. 어차피 약 먹고 나면 기억도 못할텐데.

왜긴 왜야. 아직도 산타를 다 못 묻은거지. 쯧쯧 혀 차는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인생은 제로섬 게임이야. 정신차려. 나도 아는데… 하, 나도, 팀장님 만큼만 남들에게 무심해질 순 없을까.

“산타 아저씨 때리지 말아요!”

눈을 떴다. 내 옆에 소희가 서있었다. 팀장은, 얜 뭔데, 하는 눈빛으로 소희와 날 번갈아 쳐다봤다.

“어이구, 이젠 애랑 쌍으로 지랄하려고? 난리 났네. 난리 났어.”

“죄송합니다.” 난 다급히 소희를 들쳐멨다. “다시 차에 두고 오겠습니다.”

“왜 산타 아저씨 때리고 그래요!” 소희는 팔 다리를 버둥댔다. 내려줬다가는 가서 멱살이라도 잡을 판이었다. 하지만 좀체 내려줄 기미가 안보이자

“불감증이나 걸려라!”

“부동산에서 떨어져버려!” 하고 마구 소리를 질렀다. 팀장 표정을 굳이 보진 않았다. 아마 새빨개졌겠지.

“나오지 말라니깐.” 소희 발엔 진흙이 잔뜩 묻어있었다. “발도 맨발이면서. 안 추워?”

“아저씬 안 아파요?”

“나?” 지금 어떻지. 아픈가? 볼이 조금 아픈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보면 누가 나한테 질문하는 일 자체가 참 오랜만이었다. 답변하는 법을 까먹을 정도로 말이다. 결국 빈 웃음만 몇 번 지어주고 다시 팀장에게 돌아왔다.

“하… 내가 때리려고 때린 건 아니고… 미안하다. 어쨌든,”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담배연기 같았다.

“종민아. 그래도 보니까 애가 어려서 다행이다. 어릴 수록 기억이 더 잘 지워진대더라.” 팀장이 말했다. 난 말없이 땅만 쳐다보았다.

“일단 본부서 약 한 통 챙겨왔거든? 저기 음수대에서 물 한 통 떠 와. 빨리.”

“소희가 먹나요?” 뭐야, 갑자기. 또 혓바닥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네가 먹게?”

“하지만… 뇌에 굉장히 큰 타격이 온다고 들었는데요…” 멈춰, 제발.

팀장 아랫턱이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 어쩌자고.”

“아니, 그, 애가 너무 어린데…” 너 그러다 잘려.

“하, 씨발! 그러게 왜 들키고 지랄이야!” 고함이 날아왔다.

“부작용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랜다. 연구팀에서 말해줬어. 그냥 빨리 먹이고 오늘 밤은 조용히 넘어가자. 제발.”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 물 떠 와.”

“……”

“잘 생각해. 마지막으로 묻는거야.”

뭐해. 방금 전까지도 이럴 생각은 아니었잖아. 지금이라도 빨리 물 떠 와. 어떻게 얻은 기횐데 이렇게 날릴거야? 야, 인생은 제로섬 게임이야. 누구 하나는 손해를 봐야해. 그걸 꼭 너가 할 필욘 없잖아.

“죄송합니다. 못하겠습니다.”

“네가 뭐 성인군자야? 예수야? 산타야? 네가 뭔데. 어? 왜 나까지 끌어들이냐고 이 새끼야.”

예수와 산타라니 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생각했다. 난 고개를 푹 숙였다. 산타라… 대체 어디 있는거람. 맨날 손해보는 역할은 나만 맡기고 말야.

“그래, 씨발. 알아서 해. 대신 들키면 너가 다 책임 지는거야. 택배 배달원 얘기 기억 나지?”

“넵.”

“꺼져. 다신 보지 말자.”

팀장은 자기가 끌고온 차를 타곤 가버렸다. 난 차가 가고도 한참동안 우두커니 서있었다.

 

부르릉, 시동이 걸렸습니다. 눈이 자꾸만 감겼습니다.

넌 네 집으로 가고, 난 다른 집으로 가는거야. 알겠지?

네.

그리고, 산타 아저씨가 집에 왔었다는 말은 절대 하면 안돼. 말하면 아저씨가 두드려 맞거든. 아까처럼.

왜요?

알고 싶니?

네.

대신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된단다.

아빠랑 엄마한테도요?

그렇지.

알겠어요.

아저씨는 심호흡을 했습니다. 흐읍, 후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고-, 한 번 더 들이마셨다가- 내쉬고-, 또 다시 들이마셨다가- 내쉴 타이밍에 이야기는 시작됐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아저씨는 산타란다. 아니 정확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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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여서 SANDEA라고 하지. 우리끼린 그냥 산타라 불러.

그건, 산디아잖아요.

영어를 참 잘하는구나. 하지만, 어쩌겠니. 그게 인생인걸.

그건 참 어려운 이야기였습니다. 산댜가 어째서 산타가 되는지, 또 어째서 그게 인생인지,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인생이란 말을 쓰다니, 아저씨도 어른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작년부터 우리나란 인구 자연 감소에 돌입했단다. 출산율은 0.977명인데 반해 조이혼율은 2.2명을 찍었어. 2132년 무렵에는 한국이란 나라가 아예 사라질 수도 있다대. 정부에선 즉각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팀을 꾸렸지. 저출산 사태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내라. 쉽지 않은 과제였어. 전국 각지의 전문가들을 긁어모았음에도 불구하고 연구에 착수한지 1년 반이 지나서야 성과가 나올 정도로 말이야. 먼저 연구팀은 자녀가 없는 부부의 도파민, 세로토닌 그리고 옥시토신 수치가 그렇지 않은 부부에 비해 절반 정도밖에 안된다는 사실을 확인했어. 다음으로 그들의 해마가 사분의 일 가량 작다는 점에 주목했지. 결정적으로 올 가을 여준동 박사님이 위 증상들에 전염성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어. 자녀가 있는 부부와 자녀가 없는 부부가 한 시간 이상 대화한 경우에 자녀가 있는 부부에게서도 도파민과 세로토닌의 감소가 관찰된거야. 일련의 증상들은 모두 한 가지 원인을 지목하는 듯 했지.

전염성 우울증

연구팀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종 호르몬제를 개발했어. 지속적으로 흡입할 시 도파민, 세로토닌 그리고 옥시토신 수치가 증가하는 휘발성 액체. 하지만, 그 약을 일반 가정에 보급할 방법이 없었어. 처음엔 택배 기사를 이용했지. 약을 디퓨저 형태로 포장해서 집집마다 나눠주는거야. 꽤 효과적인 방법이었어.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가 뭘 시켰는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택배기사 한 명이 마약사범으로 잡혀들어가면서 이 계획은 폐지됐단다. 호르몬제에서 소량의 마약 성분이 검출됐거든. 다음은 개를 투입했어. 분양받기 직전인 개에게 호르몬제를 바르는 방법이었지. 자연히 얼굴에도 문대고, 안기도 하고, 그러다보면 저절로 투약되도록. 무엇보다 누가 마약사범 신고를 할 걱정도 없다는게 장점이야. 누가 강아지털에 마약이 들었다고 의심하겠어? 물론 이 작전도 오래가진 못했지. 보급률이 낮았거든. 요새 사람들은 다 아파트에 살아서 그런가, 개를 안 사더라고. 어쨌든 그 다음에 나온게 SANDEA란다. 산타 말하는 거죠? 그래

산타

야. 우리 임무는 매일 밤 사이가 안 좋은 부부의 집에 디퓨저를 두고 오는 거란다. 디퓨저, 저희 집에도 뒀어요? 응. 어디에요. 소희 부모님 방에. 저희 부모님도 사이가 안 좋은 편인가보네요. 아무래도 그렇지. 그런데 말이에요, 디퓨저는 효과가 있어요? 참 이상한게 효과가 안 나와. 출산율은 되려 더 떨어졌어. 연구팀은 좀만 기다려보라더라고. 멍청이들이네요. 그렇지.

도파민이라던지 세로토닌이라던지, 모르는 단어를 들으니 더 졸렸습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창밖 풍경이 바뀌었습니다. 저 멀리 웬 산이 보이는 것도 같았습니다. 아저씨, 아저씨, 저기 부동산이에요. 아저씨, 저거 혹시 말로리 아저씨 아니에요? 아저씨, 아저씨…

소희야 일어나렴. 정신을 차렸을 땐 벌써 저희 아파트 앞이었습니다. 이제 가자. 아저씬 저를 들쳐메고, 내려올 때 만큼이나 조용하게 다시 올라갔습니다. 뒤로 가로등이 보였습니다. 전 다시 손을 흔들었습니다. 다녀왔어. 흐읍, 후우. 가로등이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들어가라.

 

“들어가라.” 현관 앞에 소희를 내려주었다.

“잠시만 기다려봐요.”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소희는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정말이지 애들이란, 꼭 헤어질 때만 되면 이런다니까.

난 살그머니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말상대가 없어져서 그런가 가슴 한켠이 허전했다.

아래를 내려다봤다. 가로등불이 둥그렇게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내 운동화 위 작은 얼룩, 내 코트 소매로 비져나온 실밥, 내 손에 난 솜털까지도 선명하게 보였다. 난 한참동안 그런 잡다한 것들을 쳐다보았다. 손끝이 시려왔다.

고개를 들었다. 가로등 바깥 세계엔 어둠이 가득했다. 밤하늘도, 소희네 아파트도, 화단 위 회양목도, 모두 하나의 덩어리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그 덩어리 속을 달리고 있을 진짜 산타가, 오랜만에 떠올랐다. 선물 가방을 등에 메고 땀을 흘리며 달리고 있을. 그리고 그런 산타가 무척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 거긴 따뜻해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거기엔 때리는 팀장도 맞는 인턴도 없나요? 역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어렴풋한 웃음소리가 들린 듯 했다. 발과 손이 점점 식었다. 춥다. 추워. 손을 겨드랑이 사이에 꼈다. 그러자 겨드랑이가 시렸다. 발을 동동 굴러봤다. 이번엔 무릎이 추웠다. 결국 난 가로등불이 흐려져가는 회색지대 위로 몸을 피했다.

“아저씨! 혼자 가면 어떡해요!” 소희가 달려왔다. 이번엔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이거 줄게요.” 소희 손에는 새빨간 털모자가 들려 있었다. 소희 머리에나 맞을 법한 모자였다. 난 피식 웃었다.

“이게 뭐니?”

“모자요.”

글쎄, 사이즈만 보면 장갑 같긴 한데 말야.

“이거 주려고 안 자고 있었거든요.” 소희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나한테?”

“네.”

“왜?”

“전 베테랑 크리스마스인이니까요.”

그렇, 구나. 라고 답하기엔 난 베테랑도 크리스마스인도 뭔지 몰랐다. 베지테리안과 크리스마스 케잌은 들어봤어도, 베테랑 크리스마스인이라니. 크리스마스에도 베테랑과 인턴이 있는건가. 그건 어쩐지 슬픈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테랑 크리스마스인?”

“그렇죠.”

“그게 뭔데?”

“베테랑은, 산타에요.”

그래, 산타였구나. 천 하고도 육백 사십 삼 페이지짜리 수첩을 들고 다닌다는 바로 그. 그렇게 찾을 땐 안 보이더니 왜 지금 왔어. 난 말 없이 비니 모자를 받아들었다. 어슴푸레한 온기가 손끝에 전해졌다. 새벽 세 시의 공기엔 어째서인지 꽃가루가 많이 떠다니는 것 같았다. 콧물과 눈물이 저절로 새나올 정도로. 소희는 조금 놀란 것 같았다. 나는 꽤 많이 놀랐다. 정말이지 애들이란,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건지

나는 소희 앞에 무릎을 꿇었다. 눈물과 콧물 범벅인 얼굴이었지만, 아니 그래서 더더욱 소희에게 무언가 말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타 아저씨가 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저씨의 눈이 제 눈과 같은 높이에 왔습니다.

비밀을 하나 알려줄까?

뭔데요?

어른들은, 세상의 절반을 모른단다.

절반이나요?

그래.

하지만, 어른들은 씨발이나 부동산, 불감증이 뭔지 알잖아요?

그런건 따지자면 한 페이지 정도밖엔 안돼. 천 육백 사십 삼 페이지 중에 말이야.

그렇군요. 그렇, 단다.

그럼 아저씨도 절반밖엔 몰라요?

나도.

엄마랑 아빠도요?

그렇지.

산타 할아버지는요?

산타 할아버지도. 연구팀이나, 택배원, 조지 말로리, 어빈, 애나 마틴같은 어른들도 모두 다. 다들 반만 알지. 그러니까, 앞으로 어른들이 화내면, 아님 어른들이 소희더러 몰라도 된다 그러면 소희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라고 말하면 된단다. 그렇군요. 그렇, 단다. 흰 입김이 어둠 속에 활짝 피었습니다. 그 입깁을 바라보며, 전 세상이 무엇인지, 또 인생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습니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건 분명 천 하고도 육백 사십 삼 페이지짜리 수첩보단 가벼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저씨는 모자에 머리를 억지로 구겨넣었습니다. 얼굴이 찌그러진게 웃겼습니다. 하하. 제가 웃었습니다. 허허. 아저씨도 웃었습니다. 아저씬 다시 절 안고는 집으로 데려다 주셨습니다.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전 가장 먼저 엄마 방으로 뛰어갔습니다. 어젯밤 일이 꼭 꿈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어제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리던 중에 잠든게 아닐까. 부동산도, 불감증도, 다 거짓말이 아닐까. 다행히 엄마방엔 처음보는 디퓨저가 있었습니다. 전 안심했습니다.

벌써 일어났니? 엄마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습니다. 어머. 소희야. 밖에 눈이 오네. 확실히 창밖엔 굵은 눈발이 날리고 있었습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라. 꼭 산타가 올 것 같은 날이야. 옆에서 묵직한 아빠 목소리가 났습니다. 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빠, 아빠. 전 침대에 뛰어들었습니다. 어제 말이에요…

어머 소희야 발이 이게 뭐니! 발은 진흙 투성이였습니다. 무슨 짓을 한거야! 전 조금 억울했습니다. 엄마, 발이 중요한게 아니에요. 난 어제

산타를 발견했다

고요. 말하려는 순간 아저씨가 맞는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말하면 아저씨가 두드려 맞거든. 아저씨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제가 아무 말도 안하니까, 엄마는 화난 표정을 지었습니다. 평소였다면 고개를 수그렸겠지만 오늘만큼은 저도 할 말이 있었습니다. 전 가슴을 쭉 펴고, 엄만 하나도 몰라! 라고 쏘아붙였습니다. 엄마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전 그 얼굴을 보고 한바탕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확실히 어른들도 다 아는 건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