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본능’으로 알아보는 화식과 인류 진화
주방의 풍경을 생각해보자. 가스레인지나 인덕션 레인지 위에서 달궈지는 프라이팬과 냄비, 싱크대 물속에 잠겨있는 식기류, 그리고 그릇에 담긴 음식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오를 것이다. 이러한 주방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둘을 꼽자면 바로 불, 전기 같은 에너지원과 식기류 같은 도구들이다. 에너지원이 없으면 음식을 조리하기 어려워지고 도구들이 없다면 음식을 내오거나 조리하기 힘들어진다.
주방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 둘은 인류 발전 과정의 가장 큰 전환점이 된, 중요한 존재들이기도 하다. 불의 발견과 이용은 안전한 주거환경의 확보와 식생활의 변화를 가져왔다. 도구의 사용은 인류의 수렵 활동을 가능하게 만들어, 인류는 다른 동물들과의 생존경쟁에 큰 우위를 얻었다. 이처럼 불과 도구는 선사 시대부터 인류의 발전과 진화에 기여해왔다. 나아가 불과 도구를 이용한 요리까지, 이들이 인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자.
화식이 가져온 인류 진화
불이 인류에게 가져온 혜택은 많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혜택은 바로 불을 통해 음식을 익혀 먹는 화식(火食)이다. 화식 가설(The cooking hypothesis)을 주장한 인류학자 리처드 랭엄(Richard Wrangham) 교수는 본인의 저서 ‘요리 본능’에서 인류가 익힌 음식을 먹으면서 생물학적으로 생존 경쟁에서 유리해졌다고 주장한다.
익힌 음식은 익히지 않은 음식들과 비교해 영양분의 흡수가 쉬워 소화가 쉽다. 그 예로 식품에 포함된 녹말 입자는 결정형의 천연고분자지만, 수분이 포함된 이 녹말입자를 불로 가열하면 구조가 느슨해져 흡수하기 쉬워진다. 단백질 역시 불에 가열되면 변성돼 소화 효율이 높아진다. 1987년 소고기의 혈청 알부민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 따르면, 트립신 효소에 의한 단백질의 소화율은 익힌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4배나 높게 측정됐다.
익힌 음식을 먹은 결과, 인간의 치아나 창자 등 소화 기관들은 다른 동물들이 비해 소화 부담이 줄어들었으며, 결과적으로 소화에 필요한 에너지를 줄일 수 있었다. 씹거나 소화하는데 필요한 시간 역시 감소했다.
화식은 단순히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화식은 인류의 신체 역시 변화시켰다. 소화가 쉬워진 인류는 침팬지와 같은 긴 창자 구조가 필요 없어졌다. 질긴 풀, 과일들을 씹어야 했던 치아 구조 역시 오늘날처럼 작게 진화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뇌의 발달이었다. 화식이 가져온 높은 에너지 효율은 인류가 뇌에 기초 대사 에너지의 더 많은 부분을 투입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랭엄 교수는 일부 호모 하빌리스들이 화식을 시작하면서 612cc였던 그들의 뇌용량이 진화를 거쳐 평균 870cc로 커졌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증가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와 같은 뇌용량의 발달엔 조리법의 변화, 사냥법의 발달 등 화식에서 파생된 여러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인류는 점점 화식에 적합한 체질로 변했으며, 이후 호모 에렉투스 대에서 불을 응용한 본격적인 요리가 시작됐다.
인류 사회의 분업을 만든 도구 사용
인류의 요리법 발달에는 도구의 사용이라는 또 다른 요소가 있었다. 이를 통해 단순히 음식을 불 위에만 올리는 것만이 아닌 더 발달한 요리법이 등장한다. 랭엄 교수는 호모 하빌리스의 유골 옆에서 발견된 돌망치 등 석기 유물들을 통해 인류의 식사 방식에 도구 사용이 연관됐다고 주장한다. 즉, 선사시대에 등장한 뗀석기를 통해 음식을 연하게 만들어 소화비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불과 도구의 사용은 각각 거주 환경의 변화와 수렵 활동의 증대를 불러 일으켰다. 랭엄 교수는 사냥꾼들이 화식을 통한 식사시간 단축과 불의 사용으로 밤까지 활동할 수 있어 사냥 시간이 늘어 여유가 생겼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사냥꾼들의 사냥이 주기적이고 헌신적인 활동으로 변했다고 해석한다. 대부분의 초기 공동체에선 남성이 사냥을 하고, 여성이 조리를 담당하거나 남성이 사냥의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비축분을 준비한다. 이는 조리를 통한 식사, 소화시간의 단축이 없었다면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성별 분업은 오늘날 결혼이라 불리는 가족 단위의 소규모 공동체를 탄생시켰다. 그 결과, 가족에 속한 남성은 독신인 사람들과 비교해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 생존에 유리해졌다. 여성 역시 요리를 담당하면서 자신을 지켜줄 남성과 그를 뒷받침해줄 수단을 얻었다. 랭엄 교수는 이런 공동체에서 여성 스스로가 요리를 거부하거나 떠나겠다고 위협하는 것으로 요리를 남성에게 공정한 대우를 강요하는 수단이 됐다고 설명한다.
요리로 쌓아올린 인류의 문명
요리를 통한 인류의 발전은 선사 시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초기 인류의 주방에선 단순히 음식을 불에 익히고 단단한 음식을 도구로 부수는 것이 조리의 전부였다. 그러나 오늘날 주방에선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인류는 이제 수비드 기법 수비드 기법1)으로 스테이크를 데운다. 인도에서 만들어진 향신료 카레는 일본의 문화와 즉석조리 기술을 거쳐 카레라이스로 우리 식탁에 올라간다.
조리 기술의 발전은 곧 인류 기술의 발달로 이어져왔다. 과거 빵, 맥주를 위한 발효를 위해 터득한 기술은 오늘날 미생물, 균류에 관한 연구로 이어졌다. 문화 측면에서도 요리의 변천사가 미친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포르투갈, 스페인 등의 국가들은 음식 보존과 향미를 위한 후추, 사프란을 구하기 위해 무역을 시작했고, 이로 인해 대항해시대가 시작된다. 음식 사학자 레이첼 로던(Rachel laudan)의 저서 ‘탐식의 시대’에 따르면, 대항해시대로 인해 남아메리카의 카카오와 야자 술이 유럽으로 전파돼 오늘날의 초콜릿과 데킬라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레이첼 로던은 종교 혁명을 거치면서 미사, 금식, 정찬에 사용되던 가톨릭 요리가 가족 중심의 소규모 식사로 변화했다고 설명한다.
이렇듯 요리는 선사 시대부터 역사를 거쳐 인류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주방에서 만들어진 요리에는 과거 인류가 쌓아올린 기술이 담겨있다. 음식이 식탁에 올라가고 먹히는 모습에는 그 시대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 인류가 주방에 서서 무엇을 먹을까, 어떻게 만들까를 고민하는 모습은 곧 인류가 어떻게 변화할지를 보여주는 열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