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과 사랑과 시
그리고 애매모호함에 대하여
어렸을 때부터 음식을 급히 먹었다. 내 앞에 놓인 그릇은 내가 해치워야 할 몫이었고 주어진 음식을 다 먹어 치우는 것이 그저 즐거웠다. 밥을 급하게 먹을 때마다 어른들께서 ‘소화가 잘 안된다, 위가 고생한다’며 음식은 천천히 먹어야 한다고 말씀해주셨지만 이런 말들은 튼튼한 위장을 가진 어린 나에게 하나도 와닿지 않는 말들이었다. 그러다가 밥을 한번 꼭꼭 씹어 먹어보게 되었다. 계기는 책의 한 문장이었다. “밥을 입에 넣고 오래 씹으면 침 속의 아밀레이스에 의해 녹말이 당으로 분해돼 단맛이 난다.” 실제로 꼭꼭 씹어 천천히 삼킨 밥은 달았다. 입안을 꽉 채워 목에 오는 압박감이 밥의 맛이 아니었다. 그때 여태까지 밥의 단맛을 다 놓치고 살았구나란 생각이 들며 후회스러웠다. 밥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음식들은 천천히 먹어야 그 참 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 물론 입에 넣은 첫 순간의 맛으로 그 음식의 맛이라 단정 지으면 편하긴 하다. 오묘하게 섞인 맛들이 무슨 맛인지 고민할 필요도 없고 밥 먹는 데 걸리는 시간도 단축된다. 그러나 한 평생을 살면서 세상에 있는 다양한 맛들을 못 느껴보고 죽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가. 급히 먹어서 얻을 수 있는 소량의 시간적 이득은 그렇게까지 값어치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음식을 다 먹어 치웠다는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맛들을 얼마나 풍부하고 섬세하게 느낄 수 있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의 습관은 사소해 보이더라도 그의 인생 전반에 영향을 준다. 음식을 급히 먹는 습관은 사랑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났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내 접시 위에 놓이면 음식 때와 똑같이 급히 먹어 치웠다. 사귄다는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귄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나는 것도 아닌데 빠르게 끝을 보는 데에 급급했다. 그래서 서둘러 그르치는 일도 있었고 사귀게 되었지만 허무함만 남은 경우도 있었다. 스스로의 말로 사랑을 정의해보려 하는데 부정적 능력이라는 용어를 접하게 되었다. 맴돌던 말들이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애매모호함을 견디는 것. ‘가능한 한 빨리 상대를 알아버리고 싶다며 마음껏 소비하고 성급하게 정의해버리면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여태까지의 내 모습이었다. 와인은 공기와 접촉하면서 그 맛이 달라진다. 그래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마신다. 사랑도 와인처럼 입 안에서 굴리면서 시간이 녹아듦에 따라 달라지는 향을 오롯이 마셔야 하는 게 아닐까. 와인은 다 마셨다는 결과가 좋은 게 아니라 그 과정이 좋은 것이다.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부터 연애 그리고 잊어가는 과정까지가 다 사랑이다. 첫 단맛부터 끝의 떫은맛까지가 와인이듯이.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레이스가 아니다. 주어진 삶을 다 살아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무엇을 느꼈는지가 중요하다. 우린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항상 직시하지는 않는다. 우린 존재의 언어로 대화하며 죽음을 코앞에다 놓기도 하고, 세속적인 잡어를 나누면서 죽음을 뒤로 밀어놓기도 한다. 우린 완전히 살아있지도 완전히 죽어있지도 않는다. 산다는 것은 그 애매모호함을 견디는 것이다. 삶과 죽음 사이 우리의 위치를 단정하는 순간 삶은 끝나기 때문이다. 존재에 대해서 골몰하다가 콱 죽어버리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적당히 잡어도 먹으면서 꾸역꾸역 버티는 것, 그 와중에 드는 감정이나 경험을 음미하며 풍요롭게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 음식과 사랑이 그랬듯 말이다.
시도 음식과 사랑과 인생처럼 읽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인생이 삶과 죽음 그사이를 음미하는 것이라면 시는 문장과 문장 사이 행간을 음미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여백에 무엇을 새겨넣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시를 읽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문장들을 첫맛 그대로 단정하지 않는 것이다. 애매모호함을 견디면 그 외의 일들은 자연히 이루어진다. 호수 같은 머릿속에 시가 던져지면 물결들이 치면서 이런저런 상들이 그려질 것이다. 그 상들의 피고 짐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가장 시를 잘 즐길 수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새어 나오는 생각들이 여백에 스며들면 시는 비로소 완성되는 것 같다. 이 점이 시가 다른 문학 장르들과 다른 점이다. 여백의 비중이 커서 글과 글 사이 더 많은 감상을 머금는다. 이렇게 여백을 감상으로 꽉 채워놓은 시는 스펀지 같아서 시간이 지나서 읽으면 숙성된 감상을 다시 선사해준다. 부정적 능력이야말로 시를 읽기 위한 열쇠이자 시를 통해 기를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글을 죽 쓰면서 시가 무엇인지 계속 생각해봤다. 도입부부터 내가 생각하는 시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시에 대한 애매모호함을 조금이라도 더 음미하고자 시에 대한 이야기는 최대한 뒤로 미루면서 동시에 시에 대한 내 의견을 유보해보았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음식, 사랑, 인생은 모두 시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온 이야기들이었다. 시란 무엇인가 단정 짓지 않고 그와 비슷한 것들에 대해 생각할수록 시에 대한 내 답변도 바뀌었고 그 과정은 창작을 낳는 창작의 연속이었다. 음식에서 시작된 비유가 인생까지 이어지면서 다시 시로 돌아가는 경험은 나도 상상치 못했고 새로웠다. 의식의 흐름 속에서 내가 한 일은 오직 하나, 빨리 시에 대해 말하고 글을 마무리하고 싶은 욕구를 묵묵히 참고 견디는 것. 그 외에는 그저 생각이 흐르는 대로 손가락을 놀렸을 뿐이다.
대부분의 글은 두괄식으로 글의 핵심 내용을 명시한 후에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러는 편이 독자가 이해하기도 쉽고 시간적으로도 경제적이다. 하지만 내 경험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엔 미괄식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되어 그렇게 글을 구성해보았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애매모호함을 견디게 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어떤 게 시에 대한 은유일까 도대체 언제 시 얘기가 나올까 답답하셨을 텐데 끝까지 참고 읽어주셔서 감사하다. 예시가 될 만한 시도 넣을까 생각해봤지만, 무릇 좋은 시라면 중심 소재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 없이도 그 소재를 생생히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 없이 시에 대해 논해보고 싶었다. 어쩌면 시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 앞에 써 내린 긴 잡담들을 시에 대한 시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들을 마치고 난 후에도 난 여전히 음식을 급히 먹는다. 20년 동안 못 고친 것은 어디 쉽게 가지 않는다. 사람은 사소한 것에서 그의 인생이 결정되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번 글쓰기를 하며 음식을 천천히 먹어봤고, 사랑을 천천히 마셔봤고, 시를 천천히 되뇌어봤다. 읽어주신 분들도 하루아침에 삶과 시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긴 어렵겠지만 이 글을 읽는 동안만큼은 애매모호함을 견뎌보셨으면 한다. 여러분의 삶이 한층 더 풍요로워지길 바라며 글을 급히 마무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