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듣다 보면 그 취향에 젖어 들게 된다. Malibu Night이란 노래의 “Too much whiskey in my blood”란 가사와 위스키를 수면제이자 치유 약으로 쓰는 하루키의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롯데마트로 향하게 되는 법이다 – 발렌타인 12년산을 마시고 다시는 이런 술은 입에도 대지 않겠다고 생각한 게 언제라고! 밤이 시작될 때쯤, 롯데마트로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는 일은 크리스마스 전날 엄마를 따라 이마트에 가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 든다. 무슨 일이 생길지, 무엇을 얻을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무언가 즐거운 일이 벌어질 것은 확실한.
하루키가 추천한 위스키는 커티삭과 시바스 리갈이었다. 둘 중 하나를 꼭 마시고 싶었다. 다른 위스키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은 하루키 풍으로 취해보고 싶었으니까. 평소라면 탐냈을 와인들을 제치고 시바스 리갈 12년산을 집어 들었다. 재상이가 추천해준 모찌렐라와 브리치즈 조합은 덤이었다. 꿈 같은 순간을 위한 입장료치곤 싼 가격에 장을 마무리하고 기숙사로 향했다.
잔에는 위스키 30mL, 조각낸 브리치즈와 몰캉한 모찌렐라, 불을 다 끈 방에 무드등까지. 준비는 끝났다. 책상이 깔끔하지 않은 게 약간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지난번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자 조금씩 홀짝여봤다. 갈색의 맑은 빛은 호박석 같아 무척이나 매력적이었으나 향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나무 향이 강했다. 그러나 문제는 혀에 닿는 촉감이었다. 혀에 스며들지 않고 붕 떠서 혀를 감싸는 느낌인데 꼭 나무로 혀를 코팅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독한 술인 만큼 알코올 향도 끝맛에 강하게 남았다. 심지어 모찌렐라도 혀에 붕 떠서 넘어가는 느낌이었는데 안주와 술 모두 그러니 느끼하고 거북했다. 그래서 모색한 방안은 하이볼이었다. 일본에서 마셨던 산토리 하이볼은 술 같지 않고 은은한 향으로 입안으로 꿀떡꿀떡 넘기고 딱 좋은 술이었기에 첫인상이 좋게 남았다.
시바스 리갈 하이볼을 파는 것을 본 적이 없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산토리 하이볼의 은은한 향과는 달리 탄산수를 섞어도 시바스 리갈은 개성이 강했고, 오히려 늘어난 양은 곤욕스러웠다. 은은한 나무 향이 입안을 감도는 와중 치즈로 주린 배를 채웠다. 위스키는 Malibu Night이 흘러나오는 어른의 세계로 향하는 길문 앞을 단단히 막아섰다. 꼭 어른이 되려면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처럼. 이 어여쁜 빛깔의 하이볼은 마치 어른으로 나아가는 무지개다리인 것만 같았다. 이번엔 돌아서지만 언젠가는 한숨에 들이켜주마. 무지개를 조르륵 떠내려 보내며 한 다짐이었다.
흠 이런 맛을 즐겁게 마실 수 있다니 의뭉스러웠다. 혹시 위스키는 관에 들어가기 전, 몇백 년에 걸쳐 맡게 될 나무 향에 익숙해지기 위한 예행 연습이 아닐까? 그래서 나이 많은 사람들은 위스키를 즐기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관에 대한 본능적인 아늑함이 생기는지도 모를 일이다. 위스키를 즐기지 못하는 것은 아직 관과는 거리가 먼 순수한 미각을 지녔기 때문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냥 드는 생각이지만 꿀을 타 먹으면 맛있었을 것만 같다. 그런 레시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무에 묻어나온 꿀을 핥아 먹는 맛이지 않을까? 그것도 벌의 위협도 없이 느낄 수 있는 자연 그대로의 꿀맛. 아직은 단 게 좋은 어린애인가 보다. 하나 이상한 점은 글을 쓰는 와중에도 다시 위스키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위스키는 마실 땐 별론데 나중에 떠올릴 땐 미화된다. 숙취가 없어서 그런가. 나무 향과 기분 좋은 취기엔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도 모른다. – 오늘 밤엔 오크나무 숲에서 기분 좋게 누워있는 꿈을 꿀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