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든피겨스, 편견을 뚫어낸 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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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피겨스>, 편견을 뚫어낸 영웅들

‘거짓 원인의 오류’란 드러나지 않은 요인을 배제한 채 단순히 결과만을 보고 원인을 추적하여 문제의 핵심을 가리는 잘못된 생각을 일컫는다. 햇빛 아래 죽어있는 화분을 보고 ‘식물은 햇빛에 노출되면 죽는다’고 판단하거나 낮은 이공계 여성 비율을 보고 ‘여성은 논리적 사고가 부족하다’고 단정 짓는 것이 그 예다. 드러난 결과만을 보고 단순히 원인을 추적하고선 ‘그것은 원래 그렇다’고 정당화하는 행위는 실제로 빈번히 범해지는 오류다. 50년 전 미국 역시 이 오류에 빠져 있었다.

1960년대 미국에서는 학계와 정치, 스포츠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흑인의 사회진출은 전무했고, 이에 대한 모든 원인은 ‘흑인이 원래 열등해서’로 일축됐다. 사회 도처에 깔린 차별을 인식하는 것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인종 비율 결과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훨씬 간편했기 때문이다.

3월 23일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히든피겨스>는 이러한 1960년대에 NASA에서 차별의 벽을 뚫어내고 최초를 만들어낸 영웅들의 이야기다. 인공위성 발사를 경쟁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여태까지 NASA에 흑인 여성 엔지니어가 없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흑인 여성은 엔지니어를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말 그대로 비합리적 편견이었음을 증명한다. 동시에 흑인 여성 연구원이 없는 이유는 결코 그들이 열등해서가 아니었음을 성별과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이 제정되는 당시의 시대상과 함께 녹여낸다.

천재성에는 인종이 없고 / 강인함에는 남녀가 없으며 / 용기에는 한계가 없다 (포스터 부제)

– 기사에 영화 내러티브에 대한 내용이 다소 언급되어 있습니다. –

캐서린이 일하는 건물에는 Colored(유색인종이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없다. 캐서린은 800m를 뛰어 서관에 있는 화장실을 간다. 화장실을 갈 때 마다 오랫동안 사라지는 캐서린을 보고 상사인 글랜 파월은 화를 낸다. 하지만 본관에 Colored 화장실이 없다는 사실과 항상 비어있는 Colored 커피포트를 알게 된 글랜은 건물 내 ‘Colored’ 표지를 떼버린다. 그리곤 소리친다. “Here in NASA, We all pee the same color”

<히든피겨스>는 NASA에서 함께 근무하는 캐서린, 도로시, 메리 세 흑인여성에 대한 영화다. 수학천재인 캐서린은 나사에서 보조계산원으로 일한다. NASA는 최초 유인 우주 비행 탐사 계획인 ‘머큐리 프로젝트’에 일손이 부족해지자 이례적으로 보조계산원인 캐서린을 프로젝트에 참여시킨다. 머큐리 프로젝트를 연구하는 방은 백인남성들로만 가득 차있고 이들은 방의 유일한 흑인이자 여성인 캐서린을 부당하게 대우한다. 캐서린이 커피포트를 사용하면 다음날 그 커피포트에 Colored표시가 생기는 식이다. 캐서린은 차별을 받음에도 프로젝트가 난관에 부닥칠 때 마다 방정식을 풀어내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이론으로 핵심 문제를 해결해 흑인여성에 대한 편견을 깨뜨린다.

영화는 캐서린의 계산원 동료인 메리와 도로시를 통해 차별이 개인의 진로를 제한하는 시대상을 제시한다. 메리는 NASA 정식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NASA 정식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서는 버지니아 고등학교의 수업을 이수해야 한다. 하지만 버지니아 고등학교는 흑인의 입학을 금지한다. 도로시는 실질적으로 보조계산원의 관리자 일을 하지만 관리자 승진 요청서는 번번이 거절당한다. NASA에 IBM 컴퓨터가 들어오자 이것을 다루기 위해 컴퓨터와 프로그래밍 책을 빌리려 하지만 관련 도서는 Colored 서재에 없고 백인을 위한 서재에만 있다.

노골적인 차별과 편견 가득한 시선에도 메리와 도로시는 굴하지 않는다. 결국, 메리는 법원에 청원하여 버지니아 고등학교에서 야간수업을 이수하고 정식 엔지니어가 된다. 보조계산원인 도로시는 컴퓨터와 프로그래밍을 끝까지 공부하여 흑인 여성 최초로 NASA 컴퓨터팀장이 된다.

<히든피겨스>에 비추어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1997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하 항우연)의 175명 연구원 중 여성 연구원은 단 한 명이었다. 2003년이 되어서야 17명 정도가 돼 약 10%가 됐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2016 동계연구보조원 모집 안내’를 살펴보면 7개의 모집전형 중 3개 전형 자격요건이 남성이었다. 동계연구보조원 모집의 목적은 ‘대학 재학생들을 위한 항공우주 및 다양한 분야의 업무 경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함’이었다. 세 분야는 장비를 위주로 다루는 분야여서 남성이 유리할 수 있겠지만 지원조차 금지한 것은 기회를 균등히 제공하지 않은 것이다.

2005년 한국여성개발원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중·고교 교사 10명 가운데 4명이 ‘남학생이 수학을 잘하는 것은 선천적인 차이 때문으로, 교사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고교 ‘수학실력’의 기준인 수능 수학 A형과 B형 표준점수 평균을 비교하였을 때 두 유형 모두 여학생 점수가 1점 내외로 높거나 여학생과 남학생의 점수 차이가 거의 나지 않았다. 한국에서 이공계 여성연구원의 비율이 낮은 이유가 이와 같은 사회적 편견이나 기회의 불균등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야 봐야한다.

‘흑인의 사회진출 비율이 낮으니 흑인은 열등하다’라든가 ‘여성의 이공계 비율이 낮으니 여성은 논리적 사고가 부족하다’라고 결론짓는 것은 옳지 않다. <히든피겨스>는 노골적 차별이 있었던 과거를 되짚으면서 동시에 사회적 편견이 현재에도 반복되고 있지 않은지를 되새겨준다.

흑인 여성이 NASA 중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엔지니어가 되고, 컴퓨터팀장이 되고 나서야 기성 연구원들은 ‘흑인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흑인 여성이 NASA에서 연구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열등해서가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차별과 편견 때문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보여 편견을 극복한 <히든피겨스>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듯, 천재성에는 인종이 없고 강인함에는 성별이 없다.

 

심규대 기자 dk2998@g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