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굽이 생오지 소년의 삶, 문학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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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촬영을 요청하자 문순태 작가는 “어이구, 이 상태로 찍어도 되나”라고 말하며 주섬주섬 겉옷을 챙겨 입었다. 인터뷰 내내 차와 과자를 권하는 그는 노(老)작가라기보단 우리네 할아버지처럼 친근했다.

생오지 작가, 그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다. 문순태 작가의 고향이자 지금 사는 마을 이름 ‘생오지’에서 따왔다. ‘쌩’오지라는 그 뜻 그대로, 생오지로 가려면 구불구불한 산길을 넘어 차로 한참을 더 달려야 한다. 생오지로 가는 길목, 가사문학관 내 찻집 ‘달빛 한잔’에서 문순태 작가를 만났다.

사진 촬영을 요청하자 문순태 작가는 “어이구, 이 상태로 찍어도 되나”라고 말하며 주섬주섬 겉옷을 챙겨 입었다. 인터뷰 내내 차와 과자를 권하는 그는 노(老)작가라기보단 우리네 할아버지처럼 친근했다.
사진 촬영을 요청하자 문순태 작가는 “어이구, 이 상태로 찍어도 되나”라고 말하며 주섬주섬 겉옷을 챙겨 입었다. 인터뷰 내내 차와 과자를 권하는 그는 노(老)작가라기보단 우리네 할아버지처럼 친근했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세요?
올해 나이가 일흔아홉이니, 몸이 안 좋은 데가 많이 생겨요. 작년까지는 산에도 다녔는데 산에도 못 다니고. 굉장히 조심하면서 지내요. 최근엔 문학상을 세 가지 심사했어요. 특강 같은데 의뢰가 오면 그것도 선택해서 다녀요.
소설 쓰는 데는 힘이 부쳐요. 소설 쓰기는 중노동이거든. 몇 시간 동안 집중을 해서 써야 해요. 그래서 시를 지금 좀 많이 쓰는데, 지금 시집 한 권을 다 묶었어요. 연말에 내려다 내년에 80회 생일을 맞아서 내려고요. 제목은 「생오지 시가 되다」 생오지 마을의 생태환경이나 소리에 대한 거예요. 인생을 돌아보고, 옛날을 떠올리는 그런 시들도 많고요.

그의 삶엔 굴곡이 많았다. 열두 살에 만난 6·25 전쟁은 평생 가슴 속에 남은 상처가 됐다. 그의 고향 구산리는 백아산과 무등산 사이에 위치한 공비토벌 작전지역이었다. 공비 토벌을 위해 두 시간 이내로 짐을 싸 집을 떠나라는 소개령(疏開令)이 내려졌고 고향 마을은 전부 불태워졌다. 그러나 그의 가족을 비롯한 몇몇은 평생을 살아온 터전을 떠나지 않았다. 매일같이 ‘빨치산’과 토벌대가 서로를 향해 쏴댄 총에 가족과 이웃이 희생됐다. 결국 그의 가족은 쫓겨나듯 월산리 토굴로 옮겨간다. 좁은 토굴 속에서 극도의 굶주림과 추위에 떨었던 그때, 그는 죽음조차 두렵지 않았다고 말한다.

작가님의 삶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6·25를 겪은 일이었거든요. 그때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어요.
6·25 때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자기가 선택한 이념을 위해 싸우다 죽은 것은 아름다울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념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은 거예요. 그걸 다 목격을 했어요.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념이란 도대체 뭔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념의 무의미성. 이게 항상 머리에 남았어요. 우리 이웃집 사람들이 많이 죽었는데 이 사람들이 다 농사꾼이고 평범한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에 대한 어떤 안타까움, 늘 그런 걸 생각했고. 이제는 그 사람들의 혼을 달래주는 역할을 우리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소설을 썼어요.

왜 특별히 문학을 선택한 건가요?

나는 내가 작가가 되지 않았으면 박수무당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요. 맺힌 것이 많은 사람은 무당이 되잖아. 너무나 가난했고, 너무나 외로웠고, 고향에도 마음대로 올 수 없었고. 맺힌 것들을 풀어내야 하는데 그건 문학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했어요.
나도 모르게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된 면도 있어요. 광주고등학교 들어가서 송규호 선생님이라고 글 쓰는 국어 선생님을 만났어요. 그 영향으로 문예부에 들어가게 됐어요. 또 김현승 시인이 광주에 계셨거든요. 그분을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뵈면서 ‘아, 나도 저런 시인이 되고 싶다’라는 동경을 하게 됐어요. 처음 데뷔는 시인으로 하게 됐지.
그러다가 대학 졸업하고 신문기자가 됐어요. 그때는 군사독재 때라 시대적 상황이 너무 암울했어요. 이때 내가 뭘 할 것인가, 시로 저항할 것인가. 그런데 시는 몇 마디 안 하면 끝나잖아요. 이 세상에 대해 욕도 좀 하고 싶은데. 그러면 소설을 써야겠구나. 그래서 소설가가 됐죠.

기자 생활이 문학에 도움이 많이 됐나요?
많이 도움이 됐어요. 사회 구조를 보다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거예요. 날품팔이하며 사는 사람부터 장관까지 만나면서 우리 사회가 정말 엄청나게 잘못됐단 걸 깨달은 거죠. 내가 정말 철저한 리얼리스트였는데, 관념이란 것이 우스꽝스러운 거라고 생각했어요. 새 한 마리가 창공을 날아가는데 거기다 이상, 자유, 꿈 이런 거 그냥 막 붙이는 거야. 그런데 우리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주제를 만들어내는 건 정말 어렵거든요. 우리 사회, 현실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당시 문순태는 ‘문학은 역사의 칼이다’란 말을 내세웠다. 그는 문학의 역할을 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도려내고 새로운 싹이 돋아나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문학의 진정한 목소리는 빼앗기고 짓밟히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가슴에서 터져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의 문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변화했다. 초기에 밑바닥 인생의 한을 풀어냈다면, 그 다음엔 6·25나 5·18 등 역사와 이념의 문제를 다뤘다. 이후엔 노년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문학관도 ‘문학은 구도의 길 찾기다’라는 생각으로 달라졌다. 그는 인간다운 삶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노년 소설은 어떻게 쓰게 됐나요?

옛날 젊었을 때는 소나무를 보면 파란색만 봤어요. 그런데 깊숙이 들여다보면 소나무 안에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다 있거든요. 세상이, 역사가 가진 총체적인 모습을 다 들여다볼 수 있는 나이가 된 거죠. 그러니 소설도 달라졌어요. 인생론적 이야기를 많이 썼죠.
이런 소설집에선 주로 노년의 삶, 늙은 사람 눈에 비친 세상에 초점을 맞췄죠. 노인이 그냥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것, 그래서 노년의 삶을 통해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해답을 주고자 하는 것들이 최근에 쓰고 있는 소설들이에요.

가장 아끼는 작품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내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서 쓴 소설은 「타오르는 강」이란 아홉 권짜리 대하소설이에요. 이 소설은 역사적 인물이 아닌 그냥 무지렁이 농사꾼들, 순수 노비들이 주인공이에요. 민중의 한에 대한 이야기죠. 민중 하나하나의 한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그 한이 모이면 집단적 힘을 발휘할 수 있고, 그 힘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단 걸 얘기하고 싶었어요.
또 자부심을 느끼는 건, 그 소설이 전라도 사투리를 가장 폭넓게 구사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거든요. 하도 사람들이 사투리에 대해 물어보니까, 부록으로 「타오르는 강」의 우리말 사전이 별도로 나왔어요. 지금 우리말 큰 사전에 보면 전라도 사투리 대부분이 ‘문순태 「타오르는 강」에서’ 이런 꼬리말이 붙어있어요. 그래서 내가 제일 아끼는 작품이에요, 「타오르는 강」.

GIST 학생들에게 하고픈 조언을 구하자, 그는 이성과 감성이 균형 잡힌 삶을 강조했다. 과학 정신과 논리에 치우치지 않고, 감성과 문화도 중요시할 때 삶이 더 풍요로워진다는 것이다. 그는 GIST 학생들이 글도 쓰고, 음악도 하고, 그림도 열심히 보는 젊은이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GIST대학이 지향하는 가치와 비슷한것 같아요. 인문이나 예체능 강의도 필수로 들어야 하거든요.
요즘에는 인문학 강의가 필수로 된 대학이 많아요. 잘한 일이죠. 우리나라가 급성장을 하면서 인문학이나 문화에 대해서 소홀히 했잖아요. 그래도 이제 광주도 많이 달라지고 있어요. 저번에 광주 어느 극장에서 독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을 중계했는데, 거기에 사람이 가득 들어찼대요. 세상이 많이 변했지.
기본적으로는 책을 읽어야지. 나는 도서관을 많이 짓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책 안 읽고 인문학 해봤자 아무 필요 없다는 이야기예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쭤볼게요.본인의 소설이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으면 좋겠나요?
개인의 삶을 바꿔주고, 역사를 바꿔주고, 세상을 바꿔주는 게 소설의 힘이거든요. 내 소설이 사회를 바꾸고 역사를 바꾸는 데까지 힘이 미칠지는 모르겠지만, 내 책을 읽는 사람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바뀌었으면 하고 바라요. 작가정신이 바로 그런 거죠.

김예인 기자
smu04018@g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