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해준 ‘가짜사나이2 ep.0’을 보게 됐다. 일종의 ‘신드롬’까지 일으킨 가짜사나이를 본 적이 없기에 호기심에 클릭했지만, 남은 것은 한 가지 의문뿐이었다. “도대체 왜 이 콘텐츠가 한국을 휩쓸고 있는가?” 진흙탕에 구르면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며 고통받는 교육생들이 교관들의 무의미한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콘텐츠를 소비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몇백만 번 이상의 조회 수는 스스로 콘텐츠의 존재 가치를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나의 의문은 그 영상들의 조회 수만큼 깊어졌다.
주간지 <시사인>은 <‘진짜’를 이겨버린 ‘가짜사나이’>라는 기사에서 ‘가짜’에 지쳐 가짜에 대한 냉소주의에 빠진 한국 사회는 ‘진짜’를 갈망하고 있고, ‘가짜사나이’가 그것을 해소하고 있다고 말한다. MBC의 ‘진짜 사나이’를 패러디한 ‘가짜사나이’는 원작의 프로그램명과 방송 내용의 불일치를 전복시킨다. 과감하게 보여주는 장면 속, 교육생의 고통과 성장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였고 한국 대중들은 여기에 열광한다. 그렇게 이 프로그램은 진짜라는 위상을 얻고, 시청자는 이것이 진짜 훈련이라고 생각하며 진짜 훈련이 교육생들의 변화를 만들어냈다고 믿는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것들은 모두 ‘가짜’다. 2020년 대한민국에서 저런 방식으로 훈련을 받는 군인은 직업 군인 중에서도 정말 극소수다. 특수부대 군인이라는 직업에 대한 소명 의식 없이 저런 고강도 훈련을 버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진짜 사나이’가 실제 군대를 미화했다면, ‘가짜사나이’는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다른 관점에서 미화하고 있다. 참여한 교육생에게 지옥과 같은 고통을 버티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홍보’일 것이다. 짧은 기간에 몇백만 이상의 조회 수는 참여한 교육생에게 절대로 정상적인 방법으로 노출될 수 없는 조회 수이다. 교육생들은 그러한 인센티브가 없다면, 거기에 갈 이유도 없으며 고통을 버틸 이유도 없고 그들의 태도는 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자본주의는 쉽게 고통과 결합한다. 인간은 자본주의라는 진통제를 통해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버텨낸다. 시청자는 그들의 고통을 구매한다. 대중은 실존한다고 믿기 어려운 ‘가짜’가 내 눈앞에 ‘진짜’로서 목격되고 순순히 자신의 자본을 그들에게 건넨다. 그리고 대중은 그 고통을 충분히 즐긴다. 자신은 절대로 겪지 못할, 아니, 겪지 않을 고통을. 그리고 사은품으로 그들의 인격과 행동을 품평할 권리를 갖는다. 마치, 교육생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교관들과 비슷한 지위가 우리에게 있다는 착각과 함께. 그리고 그 권리와 착각은 교육생들에게 고통으로 돌아간다. 물론, 그 고통을 소비한 대중은 절대로 갖지 못할 막대한 자본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