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하기 이전에 이미 속에 들어와 있는 문장이 있다. 처음 내 의지로 영화관을 방문했던 즈음부터, 칸, 베를린, 베네치아, 시체스, 선댄스 따위 이국의 축제 이름을 알게 되고, 고다르, 트뤼포, 오슨 웰스를 찾아보게 된 인생의 한 분기까지, 그 문장은 내 위와 목구멍 언저리를 꾸준히 돌아다녔고, 난 한 마리 소처럼 영화가 무엇인지, 그럼 세상은 또 무엇인지를 되새김질했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그 문장은 어쩌면 영화의 본질이 아닐까. 어둑한 조명, 푹신한 접이식 의자, 자기 외엔 눈도 돌리지 말라는 듯 부담스럽게 다가와 앉은 스크린, 영화관 특유의 방향제 냄새,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르는 바람 – 그 모두는 영사기가 돌아가는 순간 사라진다. 우린 스크린 이편을 까맣게 버려둔 채 저편의 세계로 떠난다. 평균 120분, 그 시간 동안 우리 세상은 영화가 된다. 덕분에 우린 영화를 보는 동안 해방감을 느낀다. 나, 내 시선, 관점, 내 공간과 시간, 그 밖의 모든 내 허물을 잠시나마 벗어내는 데서 오는 자유. 따지고 보면, 영화제를 찾게 된 것도 어딘가 떠나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매년 5월 첫 번째 주 열흘간은 전주 국제 영화제 기간이다. 4월 중순이면 영화 리스트와 예매 일정이 뜬다. 그러면 난 4월 초에 이미 행복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방방 떠서 집중하지 못하는 내게 사람들은 묻는다.
영화제가 뭔데?
난 조금 난처해진다. 영화제가 뭘까. 그해에 새로 나온 영화들을 들여와 관객들에게 처음 선보이는 공간이라고 말해야 할까. 열흘 동안 근처 영화관을 모두 대관해 앞으로 다시 한국에 안 올 작품들을 상영하는 기간이라고 해야 할까. 업계 종사자부터 아마추어 시네필까지 영화를 사랑하는 모두가 모여 어떤 영화가 좋았다느니 이야기를 나누는 축제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도 아니면 더 구체적으로, 이를테면 전주 국제 영화제란 한국 3대 화제의 하나로, 부산, 부천 영화제와 달리 고전 작품과 인디·예술 영화를 들여오는 데 강점이 있다고 전해야 할까. 하지만, 그런 설명을 줄줄 읊으면서도 난 그것이 영화제의 전부는 아니라고, 아니 오히려 사소한 부분에 불과하다고 덧붙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그 모두는 영화제를 진행하는 방법에 관한 설명일 뿐 영화제 자체는 아니니까.
영화제는 무엇일까. 5월 4일에서 5일로 넘어가는 그 새벽에도 난 똑같은 질문을 떠올렸다. 자정부터 6시까지 공포 영화 세 편을 잇달아 상영하는 ‘심야 상영’을 보던 중이었다. 덕분에 극장에선 비명과 코골이가 함께 섞였다. 비명을 지르면서 동시에 코를 고는 사람도 있었다. 같은 심정이었다. 4일 아침부터 내리 세 편의 영화를 본 다음이었으니까. 날을 샌 뒤 곧장 영화 두 편을 더 봐야 했으니까. 우린 5월 4일부터 6일까지 2박 3일 일정 동안 열네 편의 영화를 볼 계획이었다. 머릿속에선 본 영화, 보고 있는 영화와 볼 영화의 시놉시스가 꼬인 뜨개실처럼 한데 엉겨 뒹굴었고, 덕분에 영화를 분리해 내는 데 진을 빼고 있었다. 잠깐 방금 저 배우가 누구였더라, 사람을 잡아먹던 그 장면은 무슨 의미였지, 아까 그 복선을 회수하는 건가, 아니 그건 다른 영화의 장면이었어 등등, 그러니까 머릿속이 온통 영화, 영화, 영화뿐이었고, 하도 앉아있어서 허리가 쑤셨고, 등에 흐른 식은땀이 찝찝했고, 하지만 씻을 겨를 없이 다음 영화를 봐야 한다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해야겠지 – 무척 자유로웠다. 그 순간만큼은 영화와 내 관계가 뒤바뀌어 스크린 너머의 배우들이 나를 관람하는 기분을 느꼈다.
영화제는 무엇일까. 여전히 잘 모르겠다. 영화제에 갈 때마다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낸다. 아무래도 난 정리하는 데 소질이 있는 사람은 아닌가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영화제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이렇게 전하고 싶다. 딱 한 주, 세상이 영화가 되는 순간이라고.
이승필(전컴,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