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화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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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믿는 버릇이 있다. 나쁜 버릇이라고 생각한다.

2024년 12월 3일 10시 30분 직전까지 난 믿었다. 한국이 민주 사회이며, 특정 정당의 정치적 입장과 관계없이 피차 기본적인 규칙은 지킬 것을 믿었다. 당일 오전 윤석열 대통령은 산성 시장을 방문했다. 산성 시장에는 대통령을 보러 온 인파가 가득했다. 인파를 향해 윤석열 대통령은 “저희를 믿고 힘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전했다. 그 밤 10시 17분, 대통령은 5분간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속기도, 개회식도 없었다. 회의의 폐회식을 대신한 건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였다. 국무위원 누구도 발언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계엄 선포 직후 계엄군이 선관위와 국회에 투입됐다. 23시 04분 국회 출입문이 폐쇄됐다. 국회의원들이 상황을 인지하고 국회에 모이기 시작한 것은 계엄 사령관이 임명된 즈음이었다. 23시 30분경 포고령 1호가 발표됐고, 국회 본회의 개의를 막기 위한 명령이 하달됐다. 00시 07분, 제1공수특전여단과 707 특수임무단이 도착했다. 동시에 당대표와 국회의원을 체포하기 위한 부대가 운용됐다는 사실은 해엄(解嚴) 이후에야 알려졌다.

2024년 12월 6일 오후 5시에도 난 믿고 있었다. 성숙한 제도는 개인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 5일 저녁, 의원들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대통령의 조속한 직무 정지를 요청했다. 정작 6일 오전, 여당은 입장을 바꾸어 탄핵 부결을 당론으로 결의했다. 당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안건은 두 가지였다. 먼저 진행되는 김건희 특검법 표결은 재석 의원의 3분의 2가, 다음으로 진행되는 대통령 탄핵 표결은 재적 의원의 3분의 2가 동의해야만 통과됐다. 6일 오후 5시 김건희 특검법 표결이 시작됐다. 재적 의원 300명 전원이 참석했다. 198명의 동의로 안건은 부결됐다. 국민의 힘 당원들은 김건희 특검법의 표결 마친 후 퇴석하기 시작했다. 탄핵 표결의 차례가 됐을 때 자리에 남은 여당 의원은 안철수 의원 한 사람뿐이었다. 7일 한동훈은 탄핵 대신 일종의 내각제를 대안으로 내놓았다. 대구시장 홍준표는 해당 계엄 사태를 “해프닝”이라 칭하며 탄핵까지는 필요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계엄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라며 대통령을 옹호했다. 전두환 내란 재판 상고심의 인용이었다.

쉽게 믿는 버릇이 있다. 주위의 말마따나 순진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누군가는 잘못을 잘못이라 말해야 한다. 주위에 이 말을 전하던 순간에도 난 지나치게 순진했다. 내 시선에서 이것은 정치의 문제가 아니었고, 그보단 원리 원칙의 문제였다. 정치 문제의 해결을 위해 군을 동원하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당익을 앞세워 가장 우선해야 할 의회 민주주의의 준칙을 무시한 것도 상식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대체로 관심이 없었고, 간혹 관심 있는 친구도 직접 참여할 의지를 느끼진 못했다. 나간다고 무엇이 바뀌냐 묻는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한 건, 어쩌면 나도 그 말에 조금은 동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12월 6일 저녁에도, 난 나간다고 무엇이 바뀌진 않는다던 그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운집한 사람들 사이로 찬 바람이 불었다. 목덜미가 선득했던 건 꼭 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표결은 시작됐지만, 107석은 이미 비어 있었다. 옆에선 자주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주최 측은 침묵을 채우려 인터뷰를 진행했다. 초등학생, 아주머니, 노인 분이 차례로 나왔다. 난 가벼운 체념을 한 채였고, 그래서 모니터에 GIST 학생의 얼굴이 비쳤을 때 전혀 뜻하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GIST에서 온 친구가 있을 거라곤 예상을 못 한 까닭이었다. “함께하러 나왔다”고 학생은 말했다. 함께 간 몇 사람, 이미 도착했다고 전해 들은 몇 사람의 면면이 떠오른 것은 왜였을까. 누군가는 잘못을 잘못이라 말해야 한다. 그런 내 믿음이 처음으로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하버마스의 말을 기억한다. “국가 공론장에서 중요한 쟁점을 제기하고 논쟁하는 것, 이것이 지식인의 책무입니다.” 무언가 바뀌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책임이기에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믿는다. 다른 의견을 존중한다. 하지만 그 의견을 손에 쥔 채 침묵하는 것은, 이곳에서 배우고 싶어 했을 다른 이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우리의 책임을 저버리는 일이 아닐지 묻고 싶다.

쉽게 믿는 버릇이 있다. 이 버릇을 조금 더 가지고 있길 바라는 건 내 실수일까.

 

이승필(전컴,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