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견해로는, 우리가 전쟁을 방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우리’ 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우리’는 매 순간 타인의 고통에 노출된다. 신문과 인터넷 기사는 무고한 사람들이 어떻게 범죄와 전쟁의 희생양이 되었는지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서술하고, 앙상하게 뼈만 남은 아프리카 아이들의 사진은 팝업 광고와 텔레비전 화면에 시시때때로 등장한다. 우리는 타인이 겪는 고통을에 때로는 분노와 연민을 느끼다가 곧 잊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쏟아지는 폭력적 이미지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그토록 무감할 수 있는가? 미국의 작가이자 예술 평론가, 사회 운동가인 수전 손택은 그녀의 저서 <타인의 고통>에서 잔인한 이미지와 사진들, 그리고 그것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한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이 담긴 잔인한 이미지를 바라보는 ‘우리’의 내면은 참사가 벌어진 그 곳에 있지 않음을 지적한다. 사진을 보는 사람의 관점은 언제나 찍는 사람의 어깨 바로 뒤에 있다. 우리는 전쟁이 일어난 제 3세계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지만, 어디까지나 안전이 보장되는 제 1세계의 관점으로 그것을 해석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지만, 그 연민에는 ‘나는 관계없는 일이다’는 무고함과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무력감이 포함되어 있다. 사람들이 자극적인 이미지에 무뎌지는 이유도 그 무력감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 속 잔인한 사진들은 일종의 충격 요법이다. 폭력을 당한 사람들, 죽어가며 카메라를 응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독자들에게 충격을 준다. 이 때 독자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직면한다. 단순히 잔인한 장면에 거부감을 느끼는 건지, 그들과 자신 사이에 거리를 두고 제 3자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건지, 만일 그렇다면 그들을 통해 자신의 안전을 확인하려는 욕구가 있는 것은 아닌지.
그가 찍은 사람들, 그러니까 … 아연실색된 얼굴을 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일종의 집합체로만 존재한다. 즉, 익명의 희생자들로만.
사진은 비극적인 순간들을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한다. 하지만 가족을 잃고 오열하거나 죽음을 목전에 둔 채 카메라를 응시하는 피사체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타인의 고통>은 그러한 ‘고통의 평준화’가 사진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비쩍 말라 우는 아이의 사진을 보면서도 이 아이가 아프리카 내전의 희생자인지, 중국에서 일어난 학살의 희생자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가 평준화되어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인식하게 되고, 그 순간 아이의 특정한 고통은 있을 법한 일, 전 세계에 만연한 어떤 일 중 하나로 격하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매체가 전달하는 폭력적인 이미지들에 익숙해졌다.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누군가는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들을 계속해서 재조명하는 일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에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단순한 구경꾼이 되지 말라’고 끊임없이 주지시킨다. 어떤 비극적 상황을 두고 ‘비현실적이다’, ‘스펙터클하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그 곳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온갖 매체에서 쏟아내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수전 손택은 우리가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민의 부분집합에는 무고함과 무력감 등의 감정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연민을 느끼는 대신,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타인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수전 손택이 말하는 우리의 과제이자 진정으로 남을 이해하기 위한 첫 걸음이다.
오정원 기자 jungwon98@g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