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꾸기 위한 변화’가 아닌 ‘지키기 위한 변화’를 통해 역사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 1913송정역시장은 2015년 광주송정역의 호남고속철(KTX) 개통 이후 현대카드가 추진한 전통시장 활성화 프로젝트의 산물이다. 낡고 오래된 재래시장이었던 송정역전매일시장을 개보수하고 청년 상인들을 지원하며 재탄생한 1913송정역시장은 2016년에 개장해 광주의 새로운 관광지로 떠오르고 있다.
시간을 담은 전통시장
1913송정역시장에서 ‘1913’은 송정역전매일시장이 생긴 연도를 뜻한다. 시장 입구에는 시장의 랜드마크인 대형시계가 있다. 이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개체인 이 시장을 상징한다. 송정역전매일시장은 과거에 머무른 채 쇠퇴하고 있었다. 3년 전, 이곳은 이른바 ‘지키기 위한 변화’를 하며 100년이 넘는 전통을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이으며 새로운 공간으로 거듭났다.
‘지키기 위한 변화’는 1913송정역시장이 내세우는 핵심 문구다. 광주송정역과 함께 생겨난 송정역전매일시장은 2000년대부터 대형마트와 대형슈퍼에 밀려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1913송정역시장은 오랜 역사를 가진 이 시장을 지키기 위해 현대적인 변화를 추진한 것이다. 따라서 시장을 재개발할 때 기존 점포에 새로운 디자인을 입히되, 시장의 매력인 예스러움을 최대한 보존했다.
이곳은 흔히 시장하면 떠오르는 ‘골목’보다 ‘거리’에 가깝다. 약 200m의 직선로 양옆에는 1970~80년대 정취를 풍기는 건물들이 있다. 오래된 흔적과 옛 모습을 무조건 현대화하기보다 과거를 간직할 수 있도록 보존한 노력이 돋보인다. 그래서인지 시장 거리에선 그 시절의 추억을 공유하며 발걸음을 늦추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
통일성 있는 간판도 복고풍 감성의 거리에 한몫한다. 이는 신규 청년 점포와 기존 점포가 단순히 혼재돼 있기보다 감각적인 조화를 이루도록 한다. 가게 이름 또는 간판의 글씨나 색상에선 왠지 옛날 느낌이 난다. 옛 간판을 철거하지 않은 채 점포를 연 상점도 꽤 있다. ‘대진 쌀 상회’ 간판을 보존한 채 운영하는 ‘마카롱상점’은 마카롱에 토속적인 느낌을 주어 웃음을 자아낸다.
특히 이곳에서는 화려한 간판을 찾아볼 수 없다. 1913송정역시장 상인협회 회장 범웅 씨는 “이곳 상인들은 원목 간판만 사용한다. 옛 간판을 복원해 사용하는 기존 점포가 네온사인이나 LED 등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리의 통일성을 위해 모두가 원목 간판을 고수하기로 했다”며 기존 점포와의 조화를 중시하는 시장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전체적인 분위기 외에도 시장을 거닐다 보면 그 역사가 돋보인다. 먼저 시장 바닥을 보면 곳곳에 숫자가 쓰인 동판이 있다. 이는 각 점포 건물의 최초 준공 연도를 동판에 기록한 것이다. 별로 낡아 보이지 않는 건물도 생각보다 오래된 경우가 많아 새삼스레 시장의 역사를 떠올리게 된다. 이처럼 시장 거리를 하나의 타임라인으로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다.
각 점포의 입구를 유심히 보면 ‘스토리보드’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현재 운영 중인 점포에 관한 간략한 설명과 마름모들로 구성돼있다. 특히 설명이 이야기 형식으로 돼 있어 더 정겨운 느낌이다. 마름모는 상점의 연표이다. 첫 번째 마름모에는 그 건물이 생긴 연도, 두 번째 이후의 마름모에는 상인들이 그 공간에서 장사를 시작한 연도와 가게 이름이 적혀있다. 기존 상인이 영업하는 점포의 경우 마름모가 두 개, 그렇지 않은 경우는 마름모가 세 개 이상이다. 마름모가 두 개인 경우엔 긴 전통에 놀라고, 세 개 이상인 경우엔 이전 가게의 모습을 상상하는 묘미가 있다.
낮에 거리를 천천히 걸어가다 보면 ‘히스토리 월’을 보고 멈춰 설 것이다. 흰색 바탕의 외벽엔 회색으로 된 연도와 가게 이름들이 있다. 시장 도처에 흩어져 있던 낡은 시간의 흔적을 모아놓은 것이다. 그 글씨들을 하나하나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시장의 누적된 시간과 발자취를 느끼는 데에 충분했다. 그러나 밤엔 ‘히스토리 월’만을 비추는 조명이 따로 없어 이를 보지 못하고 지나치기 쉽다.
발길 모으는 먹거리와 편의시설
이 시장에는 유명한 먹거리가 많다. 가게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영명국밥’같이 역사 있는 기존 점포뿐만 아니라 ‘갱소년’, ‘계란밥’ 등 독특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음식을 판매하는 신규 점포도 인기다. 1913송정역시장 청년상인 점포로 시작해 전국에 체인을 내게 된 ‘또아식빵’ 본점도 명물이다.
먹거리에 더해 편의시설도 시장으로 사람들의 발걸음을 모으는 데 한몫한다. 복합 문화 커뮤니티 공간 ‘쉼터’는 시장의 중앙과 끝에 위치한 야외 휴게 공간이다. 유명한 먹거리가 많은 만큼 여러 가지 음식을 조금씩 사 이곳에서 일행과 나눠 먹는 것도 좋을 것이다. 범웅 대표는 “날씨가 좋을 때 쉼터에서 종종 소규모 문화공연을 한다.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공연을 보며 쉬거나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말했다.
광주송정역에서 걸어서 3분 거리인 이곳은 역을 이용하는 여행객들이 많이 방문한다. 시장 중앙엔 이들을 위한 실시간 열차 시각 전광판과 무료로 이용 가능한 무인 물품 보관함이 있다. 1913송정역시장이 ‘광주송정역 제2대합실’의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기자가 이곳에 갔을 때는 전광판과 물품 보관함 모두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았다. 상인 채영옥 씨는 “겨울철엔 대합실에 습기가 차면서 기계가 오작동하곤 했다. 설 이후에 물품 보관함은 전자식에서 기계식으로 교체할 예정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또 오고 싶은 시장이 되려면
한편 시장의 규모가 작고 먹거리 위주라서 일회성 방문객이 많다는 아쉬움의 목소리도 있다. 1913송정역시장을 개장한 2016년과 비교하면 침체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범웅 대표는 “상인들 사이에서도 먹거리는 많은 데에 비해 볼거리가 부족하다는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 문화적인 부분을 활성화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덧붙여 그는 작년 9월 1913송정역시장에서 열린 맥주 축제 ‘비어고을 광주’가 호평을 받았다며 눈을 반짝였다. 보통 일일 유동 인구수가 500명인데 축제 때 3500명이 시장을 방문했고 매출은 3배로 뛰었다는 것이다. 이에 힘입어 올해는 맥주 축제를 상반기에 2번 하반기에 2번 개최할 예정이다.
이어 그는“1913송정역시장 3주년을 맞아 제대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다문화 가정의 부부를 위해 전통 혼례식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렇듯 행사가 많으면 사람들이 우리 시장을 다시 찾아줄 것으로 생각한다. 또 오고 싶은 시장을 만들고 싶다”며 볼거리 많은 시장에 대한 바람을 전했다.
낮엔 시장의 역사를 강조하는 오브제 때문에 정겨운 분위기라면, 밤엔 거리를 비추는 눈꽃 전구 덕분에 낭만적이 분위기가 감돈다. 100년이 넘는 시간, 다양한 먹거리, 방문객을 배려한 편의시설 모두를 갖추고 있는 곳, 바로 1913송정역시장이다. 날씨도 풀리고 있는 요즘, 친구나 연인과 함께 이곳으로 주말 나들이를 떠나보자.
정다인 기자 dainj981@g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