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역사는 자유의 신장이다. 고대에는 왕만이 어떠한 법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신이 행하고자 하는 바를 자유롭게 실천할 수 있었고, 중세에는 봉건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귀족도 계약에 의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됐다. 근대에 일부 계층이 누리는 자유의 불합리를 발견한 시민 계층은 혁명을 통해 자유를 되찾았고, 현대에는 세계 인권 선언으로 모두의 자유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자연이 진공을 허락하지 않듯 권력도 공백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모두가 자유를 보장받은 것처럼 보이는 현대에도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의해 만인의 자유는 요원해지고 있다.
고작 100년 전만 하더라도 인터넷이 없는 삶은 당연한 것이었다. 정보를 위해서는 발을 열심히 놀리며 사람이나 서적을 통해 정보를 수집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가만히 앉아서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논문, 정책의 변화, 실생활 팁과 같은 정보들을 쉽고 빠르게 얻을 수 있다. 엄청난 편리성으로 인해 인터넷을 사용하는 시간이 밥 먹는 시간보다 긴 지금, 인터넷 없는 삶은 쉽사리 생각하기 어렵다. 인터넷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전 세계적으로 사회, 경제 측면에서 큰 혼란을 야기할 것이다.
이렇게 과학은 못 느끼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삶에 스며들고, 보이지 않는 권력이 돼 이제는 우리를 지배하려 들고 있다. 없었을 때에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한 번 사용하고 나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마약 같은 과학에 의해 현대인이 중독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과학이 낳은 산물을 이용하고 과학을 배우면서 우리는 무의식중에 과학은 ‘참’이라는 명제를 받아들이고 있다. 과학이 절대적 진리를 내포한다면 과학의 산물에 빠져들어도 문제 되지 않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무려 중학교 수업 때부터 배워왔던 아보가드로의 분자설조차 절대적인 이론이 아니다. 분자설과 관련된 경험과 실험들이 이를 귀납적으로 뒷받침하고 있기에 가장 적합한 이론으로 여겨지고 있을 뿐, 반례 하나만 발견되면 거짓인 이론이 된다.
과학자는 진리를 추구하겠지만, 과학은 근사의 예술에 불과하다. 예술가들이 그들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세계를 캔버스나 미디어 매체에 표현하고자 하듯, 과학자들은 그들이 찾아낸 새로운 사실들을 방정식이나 모델들을 통해 규명하고자 한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밝혀낼 수 있는 것은 실체의 일부분, 깊은 진실의 근사밖에 알지 못한다. 복잡한 세계를 구성하는 실체의 수나 함수를 간단한 수나 함수로 바꿔 표현함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부분적인 이해를 하게 될 뿐이다. 모델들과 결론들은 넓은 우주의 일부분을 망원경의 제한된 시야로 관측한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근사를 한다고 해서 과학적 방법론이 타당성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 방법론은 현상을 연구하고 새로운 지식을 구축하거나 이전의 지식들을 모아 통합할 때 사용되는 기법으로, 경험과 측정에 근거한 증거를 사용하여 현상의 원리를 밝히는 과정이다. 즉, 관측하고 있는 값이 완벽한 참값이 아니더라도 근거는 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근거를 바탕으로 탄탄하게 구축된 모델이 논리적이며 관측된 현상을 훌륭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과학적 방법론은 타당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과학이라는 학문은 타당하지만, 학문의 특성상 ‘무조건’이라는 단어는 적용될 수 없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해석이 완벽하다고 여겨졌던 뉴턴 역학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인해 송두리째 무너진 것처럼, 기존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관측되고 재해석이 이루어지며 과학의 패러다임은 변화한다.
현재의 패러다임에 발맞춰 과학 기술의 발전을 이루기 위한 노력 역시 중요하지만, 이전의 연구 및 이론들을 맹목적으로 믿으며 그 안에서만 사고하기보다 무엇이든 끊임없이 의심하는 자세를 기른다면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위대한 업적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