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9일 막을 내린 문재인 정부는 노동개혁과 연금개혁을 외면했지만, 독일은 용기있는 개혁으로 위기를 골파한 대표적 성공 사례다. 1990년 통일 이후 독일은 ‘통일 특수’를 누렸다. 그러나 1992년부터 통일 특수가 줄어들고 막대한 통일 비용으로 경기가 침체하면서 1993년에는 경제 성장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피폐한 동독 지역 재건을 위한 인프라 투자에 따른 재정적자, 사회보험 지출 증가 및 명령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대량 실업 등으로 불황이 깊어졌다. 유럽 최강자였던 독일은 그 무렵 ‘유럽의 병자’로 풍자되기도 했다. 위기 상황에서 1998년 취임한 사민당 소속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노사협의체를 통한 노동시장 개혁에 착수했다. 하지만 현격한 노사의 입장 차이로 합의 도출에 실패하면서 상황이 더 나빠져 2003년에 다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면서 실업자가 438만 명이나 쏟아졌다. 슈뢰더 총리는 기존의 노동시장·사회보장제도·산업정책으로는 당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없고 경제적 뒷받침 없이는 독자적인 외교와 안보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경직된 노동시장 제도와 실업자를 과잉보호하는 사회보장 제도가 해고와 신규 채용을 어렵게 했다. 게다가 고령화와 글로벌화, 유럽연합(EU) 통합이 빠르게 진행되는 환경에서 독일 경제는 갈수록 쇠퇴해갔다. 슈뢰더 총리는 경제 위기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고 기업 친화적인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동시장 제도와 사회보장 제도 개혁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노사는 수동적으로 참여했다.
개혁은 노동시장 유연화, 규제 완화, 사회보장 제도 개혁, 사회보험료 축소 같은 기업 친화적 성격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예를 들면 저임금 취업을 활성화하고, 실업수당 지급 기간을 대폭 단축하고, 실업자의 취업 노력을 강화하고, 연금 재정 안정화를 위해 인구구조와 노동시장 상황을 반영해 연금을 삭감하도록 했다. 슈뢰더 총리는 야당과 노동조합은 물론 사민당 내부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지만 정치 생명을 걸고 국가 대수술 차원의 개혁을 추진했다.
당시의 개혁을 통해 독일 기업의 국제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었고, 이는 수출 증대와 일자리 창출을 통해 실업자 수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데 기여했다. 결국 독일 경제가 재도약할 수 있는 큰 계기가 됐다. 그러나 슈뢰더 총리는 노동조합을 위시한 전통적 지지 세력의 외면으로 2005년 조기 총선에서 참패하고 사민당이 분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슈뢰더 총리의 개혁 기조를 보수당인 기민당의 앙겔라 메르켈 정부가 계승했고, 결국 개혁에 성공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2005년 11월 의회에서 행한 취임 연설에서 슈뢰더 전 총리가 국가를 위해 개혁을 추진한 데 대해 감사의 뜻을 표했다. 독일 사례는 국가 이익을 정파 이익보다 우선시해 국가의 재도약을 위한 경제 개혁을 정부 주도로 실시하고, 정권 교체에도 전임 정부의 바람직한 정책을 계승하는 일관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필자는 2017년 5월 문 정부 출범 당시 국정철학 공유를 목적으로 열린 회의에서 국책연구기관 원장들을 대상으로 독일의 이런 모범적 사례를 소개했다. 그 자리에서 앞선 정부의 좋은 정책을 선별해서 이어가는 정책의 일관성 유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당시 회의에 참석한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박근혜 정부에서 잘한 정책이 있으면 나중에 알려달라”는 말을 듣고 전임 정부의 정책이라면 무엇이든 부정하려는 아집과 편견에 놀란 기억이 있다.
10일 출범하는 윤석열 정부는 문 정부가 방기한 노동개혁과 연금개혁에 착수하길 바란다. 동시에 당리당략을 떠나 국익의 관점에서 앞선 정부에 유용한 정책이 있다면 선별해 이어가는 열린 자세도 보여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