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경험한 우리 청년세대, 예의 바르고 친절하다고 생각한다. 허나 왠지 모르게 친절함 이면에 묘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더는 대학 강의실에서 옆자리 사람과 거의 대화하지 않는다. 서로 말 걸지 않는 것이, 무관심이 미덕이라 여겨진다. 상대를 철저히 존중해 버린 나머지 상대방은 없는 사람처럼 여겨지는 셈이다. 이런 현상을 ‘친밀성 상실 현상’이라 부르고 싶다. 그렇게 우리 사회에 친밀성이 점점 상실되어 간다.
친밀성; 다름과 차이를 포용할 힘이 필요하다
흔히들 누군가와 친하면 같은 것 때문에 친해진다고 생각한다. 정말 이것이 전부일까? 오로지 같은 것을 바탕으로 뭉치는 것은 편 만들기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와 친해지려면 같은 것만으로 뭉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무엇이 더 필요할까?
유유상종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인다는 의미다. ‘비슷하다’는 같진 않지만 닮은 점이 있음을 뜻한다. ‘닮았다’는 미묘하게 다름을 뜻한다. 서로 다르기에 끌리고 친해질 가치가 있는 것이다. 당신과 정말 똑같은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그 사람과 가까워질 수 있겠는가?
누군가와 친해지려면 처음엔 공통점을 중심으로 모이더라도, 결국 다름과 차이를 수용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다름과 차이를 포용할 힘이 필요하다. 이를 해내지 못하면 누군가와 깊게 가까워질 수 없다. 겉으로만 친해 보이는, 아주 얕은 수준의 관계에서 그친다.
우리 사회에 친밀성이 점점 사라진다. 다름과 차이를 포용할 힘도 줄어든다. 다름을 이해하기는커녕,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하고 혐오하기 시작한다. 남녀 갈등, 외국인 혐오, 학교 폭력 등. 그렇게 우리 사회는 점점 따뜻함을 잃어간다.
우리는 어쩌다 친밀성을 잃어가게 되었을까?
병적 자본주의; 우리는 무엇을 위해 물질적 풍요를 좇는가
기성세대와 달리 청년 세대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세대에 태어났다. 청년 세대는 물질적 풍요를 당연시 여기고 더 큰 물질적 풍요를 좇는다. 부동산, 투자, 코인, 창업 등 표면적으로는 누구나 쉽게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은 허상에 불과하다. 현재 우리 사회는 모든 구성원의 바람을 품어줄 수 없다. 부의 대부분은 이미 극소수가 독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늘구멍 싸움에 불과하다.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진다. 경쟁이 필요하지 않은 부분까지 경쟁으로 여겨진다. 끝없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다. 타인에 비해 크게 뒤처지지 않았음에, 나보다 뒤처진 타인이 있음에 안도한다. 타인의 불행이 있어야 나의 행복이 가능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발생한다. 결국 타인은 자신의 가치를,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입증하는 도구로 전락하는 듯하다.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친구라고들 말하지만, 동시에 자신과 끊임없이 비교되는 경쟁자인 셈이다.
개인에게 남은 선택지는 거의 없다. 물질적 풍요를 좇는 바늘구멍 싸움에 그저 뛰어드는 수밖에. ‘일단 돈 벌고 보자!’라는 추종이 사람들을 지배한다. “돈 벌어서 뭐 하게?”라고 물으면 “음… 좋은 차 좋은 집 사려고”가 대부분이다. 좋은 차와 좋은 집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은 찾아보기 힘들다. 부자가 되고 싶은 구체적 목적이 없는 셈이다. 목적이 구체화되지 않으니, 수단과 목적의 전복이 일어난다. 돈 그 자체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전락한다. 그렇게 수단의 노예가, 돈의 노예가 되어간다.
사실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돈이 반드시 필요하다. 돈을 단기간에 효율적으로 버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도 결코 나쁘지 않다. 문제는 오늘날 너무도 많은 사람이 오직 돈만 좇는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병적 자본주의’라 부르고 싶다. 병적 자본주의 아래 생존 경쟁 속에서 정신적 풍요로움은 잊힌다. 가혹한 경쟁 속을 살아가는 청년들, 그들에게 누군가와 친해질 시간적, 심리적 여유는 존재하기 어렵다. 그렇게 친밀성은 점점 사라진다. (친밀성 상실의 원인은 다양하다. 본 글에서는 다양한 원인 중 하나를 꼽아 소개할 뿐이다.)
친밀성이 점점 상실되어 가는, 병적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들. 어떻게 하면 이런 사회를 잘살아갈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을 제안해본다.
무엇을 매개로 연결될 것인가
과거에는 친밀성의 주체 단위가 가족이었다. 가족끼리 친하면, 부모끼리 친하면 자연스럽게 자식끼리도 친해졌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누군가와 쉽게 친밀해졌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그랬었다. 이제는 시대가 변했다. 친밀성의 주체 단위가 개인으로 바뀌었다. 이제 누군가와 친밀해지려면 개인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주체적으로 누군가와 친밀해지는 방법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노력해야 할까?
어렸을 적 이런 말을 들어봤을 테다. “학교 가서 좋은 친구 사귀어라. 나쁜 친구 사귀지 말고.” 그런데 누가 좋은 사람이고, 나쁜 사람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가? 사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 사이가 좋으면 좋은 사람, 사이가 나쁘면 나쁜 사람이다. 내게는 좋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나쁜 사람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와 친밀해질 때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고민하기보다, 내가 그 사람과 어떤 사이로 만날지, 무엇을 매개로 연결될지를 고민해야 한다.
책을 매개로 만나면 책 친구, 술을 매개로 만나면 술 친구, 철학을 매개로 만나면 철학 친구가 된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좋은 매개로 만나면 좋은 친구, 나쁜 매개로 만나면 나쁜 친구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자신이 좋아하는 매개가 무엇인지, 어떤 매개로 다른 사람과 연결되고 싶은지를 알아내야 한다. 더 나아가 매개를 확장해야 한다. 매개가 다양해질수록 다양한 사람과 연결되어 삶이 풍요로워지고 만족스러워지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도 다양한 매개로 연결될수록 관계는 건강해지고 풍성해진다.
모든 관계는 끝이 있다. 그 끝에서는 반드시 상처가 따른다.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면 관계 도중 발생하는 감정 소모와 관계 끝에 오는 상처를 감수할 용기가 필요하다. 즉, 부서질 용기가 필요하다. 다름과 차이를 이해하고 환대하는 마음가짐을 토대로 부서질 용기를 내어라. 이정환 생각이었습니다.
(철학자 박구용의 <친밀성 구성과 구조의 전환> 논문, 작가 임의진의 <숫자 사회> 책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