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이상 (제4회 광주과기원 문학상 – 산문 가작)

0
55

필요 이상

신재룡(전컴,19)

난 필요 이상의 돈을 너에게 쓰는 버릇이 있지.
난 필요 이상의 맘을 너에게 주는 버릇이 있지, 어찌 보면 잘못된 버릇이 있지.
– <필요이상>, 천재노창

말보로의 끝은 밝게 타올랐다. ‘불 보듯 뻔하다’라는 말이 괜스레 나온 게 아니듯이 그 불빛이 얼마나 밝고 명확했는지는 구차 설명하지 않겠다. 명석은 마음이 답답할 때면 담배에 불을 붙이고 가만히 지켜본다. 불을 붙일 때를 제외하고는 절대 입에 물지 않는다. 그건 일종의 신조다. ‘사방이 어두워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을 때, 마음속에 불빛 하나를 킨다’는 명목의 의식이지만 실제로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스물이 되어 처음 자기 의지로 들인 습관이다 보니 정이 든 것이다. 의식을 진행하는 때는 보통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과 비슷한 타이밍이다. 잠이 오지 않을 때, 시간이 붕 뜰 때, 가지각색의 순간에 명석은 담배에 불을 붙인다. 굵은 담배 한 개비가 환한 불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을 보면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주위가 일시 멈춤 상태가 되고 모든 시간이 연기를 거슬러 불 한 점으로 흘러 들어가는 듯한 환상. 담배를 잡은 손마디가 뜨거워지면 그건 환상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신호다. 발밑에 떨구고 밟아서 확실히 마무리하기 전 마지막으로 불씨를 본다. 꺼져가기 직전까지도 불은 밝고 명쾌하다. 담배 연기가 매캐하게 코를 찌른다. 보통 때라면 명석의 의식은 여기서 끝난다. 한 개비 이상을 한자리에서 태우는 것은 드문 일이다. 명석 스스로가 담배 연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까닭도 있고 단순히 시간을 때우는 용도라기엔 가격도 부담되기 때문이다. 5살 때쯤 할아버지 담배 심부름을 할 때는 가격이 엄청나게 쌌던 것 같은데 지금은 한 갑이 5,000원에 육박한다. 3분 남짓의 의식 한 번에 250원꼴이다. 집에서 받은 용돈으로 모든 걸 해결해야 하는 대학생 신분인 명석에겐 꽤나 사치인 셈이다. 그런데 오늘은 한 개비에서 그치지 않는다. 줄담배라도 피우는 것일까?

명석은 몇 분 전 이별 통보를 받았다. 그것도 전화로. 얼굴을 보고 얘기하자는 요지의 카톡을 보내봤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라는 답장이 돌아왔다. 이런, 씨발. 1년 동안 같이 먹은 밥이 몇 낀데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든 사람인 줄은 여태 몰랐다. 사람이 어떻게 한순간에 돌아설 수 있지. 헤어진 것보다도, 일방적 통보 후에 보이는 지영의 전혀 다른 면모가 더 놀라웠다.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를 중심축으로 그녀의 성격은 180도 뒤집어졌다. 다신 명석을 볼 일 없다는 데까지 계산이 미치자 완전히 남으로 대하는 것 같았다. 하긴 전 남자 친구, 그것도 자신이 일방적으로 이별을 고한 전 남자 친구는 남보다 껄끄러울 테다. 이별 범죄도 간간이 일어나는 마당에 명석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요즘 같은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저 정도 처세술은 기본 소양이지. 연애의 마지막 순간에 명석은 그녀가 더 존경스러워졌다. 왠지 지영은 취업도 더 잘할 것 같다. 갑자기 샘이 난다. 여자애들은 인간관계에 대해서 어디서 따로 교육이라도 받아 오는 것일까? 그들은 마음속에 스위치라도 있어서 정이란 것을 켜고 끌 수 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럽다. 어제의 적이 오늘은 친구가 될 수 있고, 오랜 친구가 내일 또 적이 될 수도 있는, 그녀들의 복잡한 사정이 무서워졌다(실제로 명석은 지영이 흉보던 친구에게서 필기 자료를 살갑게 빌리는 걸 목격하기도 했다). 그런 사회적 지능이 만약 타고나는 것이라면 남자들한테 너무 불리하다. 헤어진 이유도 제대로 못 들은 명석은 이 사건을 철저히 관찰자 시점으로 접근했다. ‘21년 6월 13일 22세의 유지영 양은 같은 19학번 동기 김명석 군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이런 헤드라인을 접한 정도의 느낌일 뿐, 아직 명석은 그 파란 안에 들지 못했다. 알려지기만 하면 박종헌(명석의 대학에서 공신력 있는 소식통이다) 선정 1학기 최고의 스캔들이 될 사건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명석이 애먼 담배만 계속 태우며 어떠한 감정도 배제한 채 지영에 대한 순수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까닭이다. 이는 현명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어차피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상대 쪽에서 대화를 거부한 순간 헤어진 이유, 정확히 말하면 차인 이유를 명석이 밝혀낼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그건 지영만 아는 채 영원히 묻힐 비밀이다. 아마 지영도 1년 뒤 6월 13일이 오면 까먹을지도 모른다. 아니 백 퍼센트 까먹을 것이다. 20대 젊은이들의 사랑이 끝나는 데엔 별 이유가 없는 법이다. 파스타를 국수처럼 먹는 것만으로도 정떨어질 수 있는 나이이기에.

지영에 대해 계속 생각하다 보니 지영이 보고 싶어졌다. 시각은 11시쯤. 일과는 끝났지만, 하루를 마무리하기엔 애매한 시각이 그들이 주로 만나던 때였다. 대학생들은 진작에 술을 마시러 나갔고, 대학원생들은 아직 랩실에서 풀려나지 못해 학교는 한적했다. 명석과 지영은 텅 빈 캠퍼스를 함께 거닐곤 했었다. 배꼽시계가 제때가 되면 울리듯 11시가 되자 지영을 부르고 싶어진 것이다. 교정에 핀 꽃들 사이를 한 번 걸어주고, 한적한 벤치를 찾아 캔맥주를 나눠 마셔야 하는데. 이러라고 비싼 돈을 주고 널 산 게 아니야. 명석은 울적해져 담배만 나무랐다. 잠시나마 차였다는 사실을 뇌에서 걷어내 준 게 바로 그 담배인데 말이다. 명석은 차였다는 사실이 스멀스멀 몸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헤어지자. 더 이상 니가 좋지 않아.’ 사투리 섞인 지영의 말이 주위를 맴돌다 이제야 고막에 닿은 듯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침이 멈추질 않았다. 벌써 반 갑 분량을 태운 것이었다. 안 그래도 담배 연기에 예민한 명석은 눈물 콧물을 뺐다. 담배는 이만하면 됐다. 진득한 술이 당겼다.
명석은 방으로 돌아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안은 익숙한 상표의 맥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 처음 마셔본 맥주인 블랑부터, 무슨 맛인지 모를 기네스, 이제는 매그너스에게 최애 맥주 자리를 넘겨준 써머스비까지. 편의점의 세계 맥주 칸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언제든지 마시고 싶을 때 바로 마실 수 있게 명석이 신경 써서 채워놓기 때문이다. 치킨 냄새가 물씬 풍긴다. 룸메이트 종헌이 어제 먹다 남은 야식을 대충 쑤셔 넣어둔 탓이다. 음식물은 빨리빨리 치우라니까. 종헌은 물건을 아무렇게나 두는 버릇이 있다. 방을 더럽게 쓰는 것은 명석도 그러려니 하지만 맥주들의 소중한 보금자리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하물며, 이상한 구석이 눈에 띄었다. 써머스비는 항상 짝수 개로 쟁여놓는 것이 명석만의 규칙인데 어째 한 캔밖에 안 남아 있는 것이었다. 종헌, 이 자식이 몰래 빼먹은 것이 분명했다. 지영과 산책을 할 때면 써머스비를 항상 두 캔씩 챙겨나갔었는데. 지영을 떠올리니 눈물이 핑 돌았다. 오늘은 화낼 기운조차 없어. 명석은 힘없이 냉장고 문을 닫았다. 오늘은 맥주로 안 될 날이다. 하는 수 없이 기숙사 1층으로 내려와 묶어둔 자전거를 풀었다. 명석의 학교는 외진 곳에 있어 뭐 하나 사려 해도 먼 길을 가야 한다. 지금 시각은 11시 23분. 편의점 말고는 다 문을 닫았을 시간이다. 아직 밤까진 여름이 미처 닿지 않아, 선선한 바람이 명석의 얼굴을 스쳤다. 적막한 교정을 노란빛 가로등들이 간간이 밝히고 있다. 꼭 달들이 떠 있는 것 같지 않아? 지영은 얼룩진 가로등들이 박힌 아스팔트 길을 달들이 비추는 거리로 바꾸는 여자였다.

명석은 습관적으로 정현에게 통화를 걸었다. 몇 번을 걸어도 정현은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명석은 신경질이 났다. 자전거를 멈춰 세우고 다시 한번 전화를 걸자 ‘삐’소리와 함께 ‘지금 거신 전화는 고객의 사정에 의해 당분간 착신이 정지되어 있습니다’란 문구가 흘러나왔다. 명석은 정현이 지난달 10일에 군대에 간 것을 떠올렸다. 머리도 직접 밀어줬었는데 여태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명석은 여자한테 차이면 정현에게 전화를 건다. 정현은 연애 한 번 못 해봤지만 꽤나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준다. 다 미디어의 힘이다. 보고 들은 게 많으니 연애고자도 남의 연애엔 척척박사다. 명석은 마지막 통화를 떠올렸다. 그때 명석은 지금과 같이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땐 사귀기도 전에 차였다는 것과 명석의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는 점이다. 명석도 나름 경력이 쌓인 셈이다. 고백하기도 전에 차인 것들까지 경력으로 쳐준다면 명석도 차이는 데에는 나름 전문가다. 정현은 남들과 달리 현실적인 조언을 해준다. 이론만 빠삭한 전문가는 냉철한 진단을 내릴 수 있는 법이다. 경험해 보지 않아야만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분야가 세상엔 몇몇 있고 사랑도 그중 하나다. 정현은‘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세상의 반이 여자야’ 같은 식상한 조언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의 처방은 뭐랄까, 알보칠 같았다. 바르면 죽을 듯한 고통을 주지만 효과는 직방이다. 자기도 발라봤다면 절대 추천할 수 없을 텐데. 중간 과정은 생각지 않고 장기적으로 가장 빨리 낫는 길을 제시해 준다.
“어차피 고통의 총량은 똑같아. 네가 감당해야 하는 양은 정해져 있단 말이지. 내 말 이해해?”
“꺼윽, 꺽….”
“그래, 그렇게라도 대답해. 괜히 안 슬픈 척 청승 떨지 마. 차라리 오늘 다 쏟아낸다고 생각해. 술이 왜 있는 줄 알아? 추출하라고 있는 거야, 감정을. 꽃들에서 향기를 빼낼 때 알코올에 녹여서 빼내잖아, 그거랑 비슷해. 술을 부어 뇌에. 푹 잠길 정도로. 그리고 울어. 몸에서 나오는 모든 물에서 술 냄새가 진동하면 정상이야. 충분히 절었다는 뜻이지. 그다음 날 깨면 싹 가셔 있을 거야. 그리움이든 슬픔이든 뭐든.”
술을 다 마시고 나면 뭐 해, 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일단 시키는 대로 하고 나니 어느새 침대 위였다. 종헌이 옆 침대에서 째려보고 있었다.
모든 기억을 담은 듯한 똥을 쌌다. 한 달 남짓 불탔던 사랑의 끝이 이런 것이라니. 익숙한 구린내는 없고 술에 전 내만 났다. 저 안에도 미생물들이 살고 있을까? 내장들이 한바탕 소독된 듯했다. 리스테린으로 헹구고 난 입안이 그렇듯 화한 느낌만 나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입을 열어봤다. 아으, 아. 울음도 더 이상 나오지 않는 듯했다. 정현의 조언에 반신반의했었지만 놀랍게도 괜찮아졌다. 정현이 왜 연애를 못 하는지 명석은 의문이었다.
명석은 정현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페달을 힘껏 밟았다. 12시가 되어가는 풍경은 한적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웠다. 가장 가까운 편의점을 가는 데에도 꽤나 먼 길을 가야 한다. 학교에서 상점가로 가려면 작은 호수가 있는 공원 하나를 지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같이 걸을 누군가가 있을 때는 분위기 있는 곳이 되지만 혼자에겐 불필요한 동선 낭비일 뿐이다. 노란 간판이 얼핏 보이기 시작했다.
“‘미니 스탑’, 잠깐 멈춰서 들렀다가 가는 곳이라니 이름이 찰떡이지. 이런 데를 그냥 지나치는 것은 실례야.” 지영은 술에 취해 돌아오는 길이면 미니스탑에 들려 메로나를 먹었다. 잠에서 덜 깬 명석은 그냥 그런대로 수긍했다. 지영은 술자리가 잦았고 그때마다 명석은 데리러 나갔다. 몇 시에 술자리가 파하든 그런 건 명석에게 상관이 없었다. 지영이 메로나를 먹는 모습은 졸음을 참고 나가서라도 볼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지영은 똑 부러지는 성격에 무뚝뚝한 편이다. 그런 지영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때가 있었는데 바로 술이 들어갔을 때였다. 애교 섞인 목소리로 지영은 명석을 불러내었고 명석은 흔쾌히 달려 나갔다. 지영이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 한다는 것, 그리고 그때 자신을 찾는다는 것이 그는 내심 뿌듯했다.

잭다니엘 허니? 이건 너무 달았었다. 얼핏 들어본 것부터 난생처음 보는 알코올들까지 온갖 술이 명석을 반겼다. 요즘 편의점은 너무 잘 되어있다니까. 학생 가에 위치했음에도 미니스탑은 대형마트 못지않게 양주 코너의 구색을 갖춰 놓았다. 이렇게 많은 종류의 술을 대면하는 것은 명석도 처음이었다. 대학생의 지갑 사정은 어딜 가나 비슷하고 소주라는 싸고 좋은 친구가 있으니까 말이다. 여럿이 모였을 때 싸게 마시기엔 소주만 한 게 없다. 그런데 오늘은 그저 그런 날이 아니었다. 명석은 빠르게, 더 빠르게 머리를 후려쳐 줄 몽둥이를 찾고 있었다. 매가 약이다. 정현의 가르침을 몸소 실현하며 나름대로 덧붙인 결론이다. 이렇게 필요 이상으로 지영을 떠올리고 아파하는 것은 머리가 멀쩡하기 때문이다. 명석은 도수가 높은 술을 필요로 했다. 선배들이 가끔 비싼 술이라며 양주를 들고 오는 경우가 있었기에 몇몇은 안면이 있었다.
“명석아, 형이 아껴둔 거야. 한번 마셔봐. 원래 양주는 한입에 들이키는 거야.”
비싼 거라길래 뭣도 모르고 꿀꺽꿀꺽 삼켰던 기억이 떠올랐다. 혀부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혀뿌리 뒤로 여러 굴곡을 지나 밑으로, 밑으로 향하는 알코올. 식도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게 된 날이었다. 체온보다 도수가 높은 알코올이 지나가는 길마다 불을 놓았기 때문이다. 맛은 끔찍했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쉬이 증발해 버리고 배부터 화끈하게 올라왔던 온기의 여운은 오래 남았다. 오늘은 그 온기가 필요했다. 스미노프, 발렌타인, 잭다니엘, 시바스 리갈… 명석은 시바스 리갈을 쥐어 들었다. 이름부터 살벌하니 싹둑 필름을 끊어줄 것 같았다. 가격도 이름만큼 살벌하긴 했지만 아무렴 어떠랴. 딱히 술을 담을 데가 없어서 한 손엔 술병을 들고 한 손으로만 자전거를 모는 모양새가 되었다. 꼭 오늘만 사는 폭주족이 된 기분이었다. 돌아가는 길은 나올 때보다 한층 더 쓸쓸했다. 당장이라도 뚜껑을 따 들이키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명석은 일찍 죽고 싶진 않았다.

대학은 12시에도 밝았다. 아직도 꺼지지 않은 실험실의 불빛들을 보면 명석은 갑갑해진다. 곧 밤낮이 따로 없는 삶을 살게 될 자신의 미래가 그려졌다. 최대한 졸업 후의 생각은 미뤄두고 있었다. 줄지어 세워진 연구동 사이를 지나가기 싫어 명석은 대학원 기숙사 쪽으로 돌아갔다. 길은 좀 돌아가는 셈이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시간을 때울 수 있으면 좋다. 잠은 저만치 달아났고 밤은 길다. 페달을 몇 번 굴리자 도서관이 보인다. 콜로세움의 축소판 같은 모양새라 멀리서도 눈에 띈다. 로마 시대부터 갇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은 몰골의 사람들이 나온다. 도서관이 문을 닫는 지금 시간엔 피로에 전 사람들이 기숙사로 이어지는 행렬을 볼 수 있다. 야밤의 행렬은 일종의 종교의식 같기도 하다. 밤낮 없이 틀어박혀 수행하는 삶은 종교인과 크게 다를 바 없지. 저렇게 살고 싶지는 않지만 명석은 그들에게 묘한 존경심을 느꼈다. 무엇에 흠뻑 빠져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사람은 어딘가 기댈 데가 필요하다. 그러나 종교와 학문, 그 무엇도 명석이 기댈 만한 곳은 아니었다. 도서관 뒤편에는 교수 아파트로 향하는 작은 샛길이 하나 나 있었다. 그 길을 따라가면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터와 정자가 있다. 이곳도 명석과 지영의 산책 포인트 중 하나였다. 지영은 신기하리만큼 항상 바빴다. 학교 축제 팸플릿을 디자인하고 대기 예측 프로그램을 짜고 화합물의 반응속도를 계산했다. 그동안 명석은 어린이 도서관 구석의 빈백을 차지하고 있었다. 원래 중학생 이상은 출입 금지이지만 사서분들께 인사성 밝은 명석은 예외였다. 만화책을 읽으며 나른한 오후를 즐기다 바쁜 지영을 꾀어 그네를 타는 것. 그것도 나름의 데이트였다. 둘은 대학원생들을 위한 아파트를 보며 기숙사를 빨리 탈출하자고 킬킬댔다.
“우리 랩실에 결혼하신 대학원생 선배가 있는데 완전 대박인 게 뭔 줄 알아? 딱 한 번 연애를 했는데 결혼까지 했다는 거야. 근데 상대분도 똑같이 첫 연애라는 거 있지. 대학원 동기였다는데 5년 동안 사귀다가 그대로 결혼까지 골인. 서로가 첫사랑이래, 대단하시지? 로맨틱하지 않아? 그래도 우린 대학생부터니까 우리가 이겼다, 그치.”
명석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잔을 두 잔 준비해서 도서관 뒤편의 정자로 나섰다. 잔이라 해봤자 종이컵 하나와 위스키 뚜껑 하나뿐이지만. 자기 앞에 한 잔, 정현의 몫으로 한 잔. 정현의 잔을 따르고 세 번 돌려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 정도까진 하지 않기로 했다. 첫 잔은 원샷이라 배웠다. 혀에 스며들지 않고 코팅되어 겉도는 나무 향. 먹어선 안 될 것을 먹은 느낌이었다.
“지금과 같은 마음을 녹이려면 적어도 40도 정돈 되어야지. 우리 체온이 36도야. 소주? 17도밖에 안 돼. 그 정도로 취하겠냐. 이게 또 마시다 보면 달아.” 명석은 정현을 따라 하며 정현의 잔도 입에 털어 넣었다. 여기에 있었다면 그는 분명 이렇게 말했겠지. 정현은 술이 셌다.

하루는 명석이 물었다. 너는 그렇게 마셔도 안 취해?
“머리가 좋아서 그래. 멍청해지는 데 더 많은 알코올이 필요한 거지.” 정현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이 답했다.
정현은 명확한 음주론이 있었다. 어찌 보면 인생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술은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명석아, 우리가 술을 왜 마실까?” 그가 귀한 걸 알려준다는 듯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다.
“흠, 기분이 좋아지니까?”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기분이 좋아지는 건 맞는데 그 이유가 핵심이야. 왜 행복해질까? 알코올이 분해되고 뭐 어쩌고…. 다 때려치우고, 술을 마시면 멍청해져. 행복의 비밀은 바로 거기에 있는 거야. 술을 한 번이라도 마셔 본 사람들은 이걸 본능적으로 느낄 거야. 하지만 나서서 인정하진 못해. 없어 보이잖아. 꼭 자기가 멍청하다고 고백하는 것 같고. 그러니까 다들 얼버무리지. 술을 왜 마셔요? 스트레스가 풀려서요, 분위기가 좋아서요 등 이상한 답변만 하고 있는 거야. 인정하고 나면 행복해질 텐데 말이야. 요즘 다들 어떻게든 더 똑똑해지려고 아등바등하잖아. 학교, 학원, 독서실, 이 세 곳만 뺑뺑이처럼 돌다가 대학에 입학해서 좀 노나 싶었더니 다시 취업 준비. 취업해서도 자기 계발 한다고 새벽반 다니면서 영어 단어 외우고 있어. 왜 그런지 알아? 어려서부터 듣고 자란 말이 공부만 잘하면 잘 먹고 잘 산다였거든. 똑똑해지면 행복해지겠지란 생각이 몸에 밴 거야. 실상은 그 반댄데 말이지. 그게 비극의 시작이야. 출발지에서 반대로 뛰는데 어떻게 도착하겠어. 대대로 멍청이들은 행복해 왔어. 시대마다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라던 철학자들이 고뇌하고 밤샐 때, 발 뻗고 잘 잤다고. 인생 어려울 게 없거든, 멍청하면. 그래, 아테네에서 제일 똑똑하다던 소크라테스 죽이고 걔네가 후회하면서 슬퍼했을까? 아니, 전혀. 쾌락의 도시에서 누릴 거 다 누리다 죽었을걸. 행복해지는 거 쉬워 술 마시고 멍청해지면 돼. 옛말 다 틀린 거 없다고, 인생사 어느 곳이 술잔 앞만 하겠냐.“
“야, 옛말에는 술을 멀리하란 말이 더 많지.”
“그런 젠체하는 놈들을 경계해야 해. 뭘 모르는 거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부정하는 거거나, 둘 중 하나거든. 걔네들 레퍼토리야 뻔하지. 말끔한 이성으로 블라블라. 듣기야 좋아 그럴싸하잖아. 그런데 좀만 생각해 봐 인간이 각성 상태로 있으면 행복한가. 대부분의 상황은 바꿀 수 없는 경우가 많아. 그럴 땐 오히려 자신을 무뎌지게 하는 게 현명한 거야.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잖아. 술은 그걸 가능케 해. 어느 곳에서나 행복해질 수 있잖아. 봐봐. 만약 똑똑한 게 그리 좋은 거라면 술이 아니라 다 같이 커피를 마시며 회식을 했겠지. 각각 낮의 음료와 밤의 음료로 떡하니 구분되는 이유가 뭐겠어. 무의식적으로 다 안다고. 사람은 심리적으로 매력적인 건 밤에 즐기고 싶어 해. 여기엔 논쟁의 여지가 없어. 솔직함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때는 아리까리 했는데, 지금 보니까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자식, 내가 언제 틀린 말 한 적 있냐.”
명석은 1인 2역을 하며 술자리를 이어 나갔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자신의 입에서 정현이 늘 하던 말들이 술술 튀어나오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현이 할 말을 상상하며 한 잔씩 주거니 받거니. 둘이 나눠 마시고 있다고 생각하니 취기도 반쯤 덜 오르는 듯한 착각도 들었다. 술은 비교적 빠른 템포로 사라져 갔다. 명석은 혀에서 얼얼함을 느꼈지만, 처음의 역함은 느끼지 못했다. 카라멜 색 병이 3분의 1쯤 맑아졌을 때, 잠시 술을 멈추고 배에서부터 올라오는 온기를 느꼈다. 바람은 한결 쌀쌀해졌지만, 밑에서부터 느껴지는 든든한 열기와 조화를 이뤄 노천탕이 따로 없었다. 사람들이 왜 굳이 일본까지 온천을 찾아갈까 명석은 의문이 들었다. 바다 건너온 위스키 한 병이면 비행깃값을 대신 할 수 있는데. 그들이 멍청한 것인지 이런 자신이 멍청한 것인지 혼란스러워졌다. 정현의 몫으로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였다.
“그래서 왜 헤어졌는데.” 정현이 담배를 한 모금 내뱉으며 물었다.
그 질문은 담배 연기와 함께 명석의 얼굴 앞에서 흩어졌다.

“니는 내가 좋아서 만나는 게 아니라, 기댈 사람이 필요해서 만나는 것 같아.”
명석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벽지에 그려진 이상한 달팽이 무늬의 개수를 헤아리며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크게 틀린 지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총 41개. 한쪽 벽면에 41개씩이니 이 방에는 대략 164개의 달팽이가 있구나. 명석이 계산을 끝마친 후에도 지영은 아무 말이 없었다. 통화가 끊긴 것인지 확인해보았지만 여전히 통화 중이었다. 명석은 숨죽인 채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무시무시한 정적은 1분이 채 안 가서 끝났지만, 체감상 몇 시간이나 지속된 것 같았다. 통화가 끝난 후에도 명석은 한동안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다. 종헌의 목격담에 따르면 꼭 햇볕에 바짝 마른 달팽이 같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165마리의 달팽이가 있었던 거군. 명석은 계산을 수정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오늘 지영이 이별 통보를 해 온 것이었다.
“나는 진짜 잘해주고 싶었는데. 실제로도 정말 잘해줬고. 술 마실 때마다 데리러 가, 가고 싶은데 있다 하면 같이 가줘, 힘들어할 때면 항상 옆에 있어 줬다고. 동기가 그렇게 중요한가. 이런 행동들이 사랑이지 뭐가 사랑이겠어. 필요해서 만나는 게 잘못이야? 아니, 그 전에 그렇지 않은 사랑이 있긴 해? 다들 필요해서 만나는 거지. 걔도 마찬가지야. 솔직해질 필요가 있어. 심심하고 무료하니까 연애를 하는 거지. 홀로서기 힘든 사람들끼리 기대는 건 당연한 거라고. 사랑도 결국은 실용적인 거야. 다이소에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거랑 똑같다니까.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매장에서 그나마 가장 나은 거로 대충 때우는 거지. 물론 이상적이게 운명적 만남으로 천생연분을 만나면 좋겠지만, 그거 기다리다간 아무도 못 만나고 늙어버릴걸. 그럼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다고. 동물들이 이거저거 복잡하게 재는 거 봤어? 달팽이들 봐봐. 걔네는 남녀도 안 따져. 아주 독한 놈들이지. 적기가 되면 아무나 잡고 일단 시도하는 거야. 상대도 어차피 자웅동체잖아. 너 말대로 너무 똑똑해져서 생기는 문제인 거 같아. 우리도 똑같이 동물인데 다르면 얼마나 다르다고. 여기서도 사랑, 저기서도 사랑하니까 진짜 특별한 게 있다고 환상에 빠져 있는 거 같아. 책임져 주지도 않으면서 매체가 다 베려놨어. 완벽한 짝, 애초에 그런 건 없어. 그 순간에 그렇게 믿는 것뿐이지”
“병신, 그럼 그렇게 말이라도 해보지 그랬어.” 정현은 한 개비를 마저 피워 물었다.
“어떻게 하냐 거기서? 마지막 한 마디만 남겨놓은 애한테. 조금이라도 그런 뉘앙스로 말했다간 그 자리에서 바로 방아쇠를 당겼을걸.” 명석은 지영이 수트를 쫙 빼입고 자신의 가슴팍에 총구를 겨누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어떤 변명으로도 마음을 돌릴 수 없는 냉철한 킬러. 이런 상상 속에서도 지영은 예뻤다.
“소설을 읽는데 주인공이 이렇게 말하더라. ‘귀찮아서 끊었어. 밤중에 담배가 떨어졌을 때 괴로운 거, 뭐 그런 것들 때문에. 어떤 것이든 그렇게 사로잡히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 느낌이 빡 오더라고. 내가 필요한 게 바로 이런 거다. 밤에 자다가도 뛰쳐나갈 만큼 간절한 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렇게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생각이 없어지잖아. 지금에야 넌 군대로 도망갔지만, 알잖아, 혼자 기숙사 생활하면 생각이 많아지는 거. 도서관, 기숙사만 오가고 기껏 하는 일탈이라고 해봐야 늘 가는 술집에 가는 게 다야. 친구들 만나서 웃고 떠들고 해봤자 그때뿐이고 말이야. 그렇게 2년을 보내고 나니까 여기서 대학원까지 졸업할 내 모습이 훤히 그려져. 앞으로의 5년도 지금과 별 다를 바 없겠지. 그게 참 숨 막히더라. 밍밍한 미래가 뻔히 그려지니까. 다들 이렇게 늙어가는구나 싶기도 하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면 시간이 너무 무겁고 길어. 어쨌든 감당해야 하는 거잖아. 다들 이런 감정을 잠시나마 모른척하려고 필요 이상으로 무엇에 의존하는 게 아닐까. 연약한 게 아니라 어쩌면 당연한 거지. 그렇게라도 의미를 부여해야 버틸 만해지니까. 나도 담배라도 피워 볼까? 매일 술에 절어 있을 수는 없잖아.” 명석은 호박색 액체를 입에 털어 넣었다. 이젠 맛도 잘 느껴지지 않아 상표만 없었다면 술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담배 연기도 못 맡는 게 무슨.” 정현도 자신의 잔을 들었다. 아니, 명석이 정현의 잔을 비우려 했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어쨌든 정현은 여기에 있지 않으니까. 그때 허벅지 부근이 차가워져 명석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높은 도수의 술이 결국 종이컵에 구멍을 낸 것이다. 명석은 자신의 장도 이렇게 구멍이 나진 않았을까 내심 걱정됐다.

‘21년 10월 입영(21-7회차) 공군병 모집 안내’
가장 빨리 가면 10월에 갈 수 있었다. 그래, 혼자 이게 무슨 청승이냐. 여자 친구랑 헤어졌다고 혼자 1인 2역을 하며 헛소리하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군대로 가자. 명석은 군대든 어디든 학교에서 도망쳐야겠다 싶었다. 20대의 초반이 이렇게 무미건조해진 건 분명 지리적 요건 때문이다. 혈기 왕성한 나이에 한적한 곳에 틀어박혀 있으니 머리가 어떻게 되는 것이다. 무료할 정도의 여유, 산책하기 좋은 공원, 특별한 이벤트 없이 흘러가는 평온한 일상. 은퇴 후에 이런 삶을 살면 성공한 건데. 이 조건을 그대로 킵해두었다가 노후에 꺼내서 쓰면….
지영과 연락을 주고받던 초기에도 이런 생각을 자주 했었다. 시간을 떼어다 원할 때 붙여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평소엔 가는 줄도 모르고 있는 듯 없는 듯 흐르던 시간들이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엔 지독히도 썼다. 실제로 연락하는 데 드는 시간은 몇 분 남짓이지만 그 사이 텀, 짧게는 15분에서 길게는 3시간까지 이어지는 기다림이 명석의 혼을 빼놨었다. 공부는커녕 핸드폰에서 손을 떼기 힘들어 웹툰만 보며 시간을 때우는 심정이란. 사랑은 시간을 텁텁하고 씁쓸하게 만들었다, 꼭 커피처럼. 명석은 이런 인내의 시간을 싹둑 잘라다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할 때 붙여 쓰고 싶었다. 이를테면 사귀고 난 후에 데이트할 때라든지 말이다. 그게 얼마나 배부른 생각이었나 명석은 실감했다. 이제는 그때마저 그리워진 것이다.
그 어떤 기다림도 없어진 지금, 시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겁게 짓누를 뿐이다. 시간이 흘러도, 멈춰도 달라지는 것 없으니 구태여 시계를 보지도 않는다. 맹물의 밍밍함이 구역질 난다는 지영의 말이 이해가 간다. 억지로 삼켜야만 하는 물 500cc. 술자리에서 술이 약한 친구는 벌주 대신에 속칭 ‘물고문’이라 해서 맥주잔을 물로 가득 채워 마셔야 했다. 물을 자주 마시던 명석은 그게 왜 벌칙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커피와 술을 즐겨 마시기 시작한 후에야 맹물의 이질감을 알게 되었으니까. 어떤 목적도 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맹물같이 심심했다. 명석은 지영과의 씁쓸했던 밀당마저도 그리워졌다. 각성한 상태이나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 하던 그때와는 상황이 반대다. 어떤 흥분도 일지 않고, 커피를 마시고 난 후의 입안처럼 말라만 가는 지금, 명석은 그때의 기다림이라도 간절했다.

술기운이 돌면 아무리 무거운 것도 무거운 줄 모르고 들 수 있다고, 머리가 반쯤 벗겨지신 외삼촌이 그랬다. 그 대가로 머리카락을 가져가는 건가요? 묻고 싶었지만 삼촌은 한 번도 지각한 적 없는 사실인 듯하여 입을 꾹 다물었다. 삼촌은 외가에서 유일하게 힘을 쓰는 직업을 가지셨고, 또 유일하게 모근이 힘을 다한 인물이었다. 머리만 풍성했으면 결혼하기가 더 쉬울 텐데, 중얼거리며 거울 앞에서 부드러운 브러쉬로 번들거리는 정수리를 자극하는 장면을 어머니께서 발견한 이후로 외가에서 탈모는 금기어가 되었다. 술이 힘을 빌려주는 좋은 친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배로 이자를 쳐서 뜯어가는 사채업자였다는 것을 삼촌이 깨닫는 것은원치 않았다. 이미 머리카락이란 오랜 친구를 잃었는데 술까지 잃을 이유가 있으랴. 적으로 시작했든 동지로 시작했든 끝엔 오래 볼 놈이 동지인 법이다.
술김인지 죽음도 한결 가벼웠다. 핸들이 이렇게 가벼운데 사고가 날 수 있을까, 더 무거운 술병을 들고도 운전을 했는데 말이다. 첫 데이트 때 3차가 끝나갈 무렵, 지영은 명석을 붙잡고 울어댔다. 너는 절대로 술을 마시고 자전거를 타지 말라고. 스무 살이 되어 같이 처음 술을 마신 친구가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다 크게 사고가 났다면서. 알겠다, 절대 그럴 일 없을거라 몇 번이나 확언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는데 그 후로 술을 마시면 그녀가 붙잡고 늘어졌던 오른팔이 유독 무거워 자전거를 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영은 이제 어느 팔에도 매달리지 않는다. 아무렴 어떠랴. 페달을 양발 가득 밟으며 아스팔트 백색 점선을 요리조리 오갔다. 학교에 둔덕이라 할 것은 지영의 가슴밖에 없었고 그 외엔 모두 평평하여 바퀴만 조금 굵다면 내리지 않고 어디든 달릴 수 있었다. 입을 크게 벌려 바람을 마셨다. 송진 가루가 연신 점막을 때려 혀와 입천장이 텁텁했다. 뭐든 입안 가득 채우는 바디감을 느끼고 싶었다. 세포벽을 지지는 강한 도수의 주정이든, 떫어서 온 혀가 말리는 에스프레소든. 빈 입에선 엿같이 악취만 났다.
의존할 곳 없는 시간은 역하다. 줄줄 흘러가긴 하지만 어떠한 향도 없는 것이 불쾌하기만 하다. 맹물보다 씁쓸하지만 분명히 향을 지닌 커피를 찾게 되는 것처럼 떫은 긴장감이라도 느끼고 싶다. 약간의 기대감이 동반된다면 더할 나위 없고. 향이 그러하듯 이내 흩어져버린다 해도 말이다. 커피와 술, 둘 다 맛만 따지면 결코 맛있다고 할 수 없다. 쓰고 떫고, 어찌 보면 고통에 가까운 것을 준다. 대신 합당한 흔적도 같이 남는다. 시간을 이겨낸 것에 대한 보상이랄까.

오전 7시. 피시방에서 돌아오면 학교는 평온했다, 명석이 밤을 새운 것과는 별개로. 산뜻한 공기를 마시며 산책하는 사람들과 학식을 먹으러 향하는 대학원생들이 아침을 분주하게 채우고 있었다. 27인치 네모 속 화려한 색감의 세상에서 헤엄치다 한순간에 캠퍼스로 건져 올려진 기분이란. 급격한 온도 차에 명석은 어지러웠다. 바다에서 막 끌어올려진 물고기처럼 당황스러웠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냐?” 민재는 명석을 꼬셨다. 때는 1학년 1학기, 아직 학교생활에 대한 로망이 다 죽지 않을 때였다. 민재와 명석은 마침 목요일 영어 교양만 들으면 그 주의 수업이 끝이라 시간이 남아돌았다. 이대로 기숙사에 돌아가 봤자 유튜브를 보며 킬킬대는 게 다였기에 명석은 구미가 당겼다. 피시방에서 게임을 주구장창하는 것과 밤을 새운다는 두 특별한 경험이 합쳐져 딴에는 둘이서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일탈이었다. 밤은 단순히 어두워진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고 그때 잠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특별한 일처럼 느껴지니까. 그런데 다음날 마주한 것은 지독할 정도로 평범히 흘러가는 일상이었다. 허무했다. 일탈에서 오는 쾌감은커녕 으레 뒤따라오는 죄책감마저 들지 없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변하기라도 하겠지 기대했던 것이 무색하게 어제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가 없구나. 명석은 피시방에서 밤을 새운 첫날부터 부질없음을 느꼈다.
그렇다고 그 이후로 피시방을 안 간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 번 밤을 새우고 나니 그보다 적게 게임을 해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매주 목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면 부리나케 자전거를 끌고 피시방으로 향했다. 부대찌개 라면에 꼬마김밥을 시켜서 국물까지 마시면 다음 날 아침까지 배도 고프지 않았다. 게임을 하는 건지 잠을 자는 건지 그 경계가 애매해질 때쯤 국밥을 먹고 돌아오는 게 명석과 민재의 루틴이었다. 게임에서 지면 죽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전투를 벌이고 침대에 누워서도 잠이 들기 전까지 게임 영상을 보았다. 물론 모니터나 핸드폰 액정에 퀭한 눈이 비칠 때면 자괴감이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 마땅히 할 것이 없는데.
끝물엔 하기 싫어도 피시방에서 밤을 새울 수 밖에 없었다. 일요일에 ‘이번 주까지만 가자’며 으름장을 놓아도 다음날이면 ‘일주일은 화요일 기준으로 새는 거지’하고 또 피시방으로 향하는 명석과 민재였다. 놀랍게도 둘 다 알고 있었다, 끊어야 한다는 것을. 소모적이고 게임으로 먹고 살 것도 아니니까. 그러나 당장의 공백감을 막는 게 더 급했다. 게임에 빠져있는 동안에는 닥친 순간순간에 급급해 딴생각이 들 틈이 없었고 기숙사에 돌아와선 따가운 눈과 뭉친 목 근육을 느끼며 바로 잠에 들었다. 몸과 정신이 피곤하면 무어라도 했다는 착각이 드니까. 적어도 미래에 대해 고민할 할 여백의 시간은 없어진다는 게 좋았다.
잠시라도 멈추면, 삶에 아무 이유가 없다고 인정하는 것으로 생각이 이어졌고 이는 너무 괴로웠다. 아무런 뒤끝이 없는 맹물은 마시면서도 의문이 든다. 맹물은 단순히 견디는 것이다. 오래 살려면 커피나 술이 아닌 건강에 좋은 물을 마셔야 한다. 그러나 그래봤자 연장되는 것은 견뎌야 하는 또 다른 여백일 뿐이다. 이 시간이 끝나고 무엇이 남을지를 생각하면 숨이 막힌다.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커피와 술을 마시면 그나마 향과 각성, 진정이 머무는 동안은 이후에 대한 생각을 비울 수 있다.
결국, 피시방을 끊게 된 건 둘의 의지 때문은 아니었다. 민재가 연구실에 들어가 인턴을 시작하고 명석도 지영을 알게 되면서 흐지부지된 것이다. 지영은 명석이 망각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피시방이 그랬듯…. 그러고 보니 지영도 명석의 의지로 끊긴 것이 아니었다.
생각이 계속되는 걸 보니 덜 마셨네. 화끈거리던 몸이 어렴풋이 식은 것이 느껴졌다. 초조함과 행복. 이완과 긴장. 취기와 똘기.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말만 많아지는 게 생각이 새나. 누수가 있는 세탁기처럼 물이 하염없이 입으로 들어오는 것만 같다. 누구에게 전해지지 않고 혼잣말로 새는지도 모르고.

툭. 360도가 돈 이후에도 – 기하학적으론 당연한 일이지만 – 명석은 아직 살아있었다. 초등학교 때 배운 낙법은 어디 가지 않았다. 찌그러진 채 페달이 두어 바퀴 더 돌다 이내 조용해진 자전거와 달리 명석의 심장은 쌕쌕거리며 방금까지의 RPM을 유지했다. 보행로 사이 무릎 높이로 박힌 돌덩이에 앞바퀴를 박고 몸과 함께 술기운이 훅 날랐다. 다행히 옆 잔디밭에 착지해 다친 곳은 없었다. 눈 앞엔 야밤의 소란으로 뾰족뾰족 성난 바위가 보였다. 명석은 다른 어디도 아니라 바로 눈앞에 있음에 감사했다. 조금만 앞으로 날아갔으면 성질 사나운 바위가 가랑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으리라. 지영이 좋아하는 아보카도처럼 무른 그곳이 근 3초 사이 과카몰리가 될 뻔했다. 죽음은 상상했어도 가는 길목의 일부였을지 모를 불구를 떠올리진 못했다. 주머니를 뒤졌다. 짜그라진 말보로 갑과 별개로 예닐곱 개비의 담배들도 무사했다. 명석은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얼른 한 개비를 꺼내어 뽀뽀했다. 담배를 줄곧 피우시면서도 58세의 나이에 득남했던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명석은 60대가 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기 힘들었다. 연금과 노후 대비, 이런 키워드들은 아직 형태는 잡히지 않았지만 가끔 명석을 두렵게 했다. 이렇게 살다가 굶어 죽지는 않겠지? 21세기 한국인데 말이야. 명석은 고개를 휘저었다. 일단 군대나 해결하자. 이때 가면 공군은 21개월이니까 23년 7월에 나오겠네. 손가락으로 두 번 꼽아도 다 세지 못하는 개월 수가 실감 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갇혀 있는 걸 못 견뎌 하는데 그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전역하고 나서도 문제다. 24살에 3학년을 마저 다녀야 한다. 가까운 미래도 먼 미래도 뿌옇긴 마찬가지였다. 그 어느 곳에도 머리를 들이밀고 싶진 않았다. ‘입영 신청’ 마지막 버튼만을 남겨 놓고 손가락이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안개가 자욱이 핀 길이 펼쳐졌다. 저 멀리 누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다. 옆 편으론 막 취직했는지 머리를 곱게 묶고 출근하는 지영의 모습이 비쳤다. 명석이 머뭇거리는 사이, 매캐한 연기 너머로 꿈틀거리는 형체가 보였다. 머리를 민 정현이었다. 명석의 이름을 정겹게 부르며 어서 와, 손짓하고 있었다. 훠이훠이, 저리 가 군바리야 부정 탄다. 명석은 병무청 앱을 꺼버리고 꺼먼 핸드폰 화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민머리의 자신이 비친듯했지만, 다행히 찰랑거리는 앞머리는 그대로였다.
이렇게 미루다 보면 대학원에 가게 될 텐데. 명석은 대학원에 가는 것도 자신이 없었다. 단순히 군대가 싫어서 대학원에 오면 결국 군대로 돌아가게 된다고 들었다. “대학원은 개미지옥이야. 군대를 미룬 연수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빠져나가기 힘들어지는 개미지옥.” 차라리 자신도 빨리 군대에 다녀올 걸 하는 대학원 선배도 있었다. 물리 실험 리포트도 쓰기 싫어 드랍한 명석은 자신이 나이를 먹는다고 그 긴 논문들을 써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이 지긋지긋한 학교에 몇 년 더 머물러 있어야 한다니. 도서관 뒤로 솟아 나온 건물엔 알알이 불빛이 박혀있었다. 저 10층 남짓한 신소재 연구동도 높은 건물이 없는 캠퍼스에선 빌딩처럼 보였다. 저 밝게 빛나는 연구실 중 한 알에는 민재도 들어 있을 테다. 1학년 때만 해도 명석과 피시방에서 살았는데 연구실 인턴을 시작한 후로는 얼굴도 보기 힘들었다. 엊그제 지영과 서먹해져 혼자 학식을 먹으러 간 명석은 그와 우연히 마주쳤었다. 민재는 밥을 다 먹고 랩실 사람들과 돌아가는 길 같았다.
“근데, 내가 지금 좀 바빠서 미안해 명석아….” 무척 반가웠지만 몇 마디 채 나누기도 전에 민재는 먼저 가고 있는 랩실 사람들을 급히 따라갔다. 명석은 돌아가는 민재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피시방 가자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앙상한 두 종아리. 웬만한 여자보다 허리가 얇아 개미허리라 불리던 민재는 못 본 사이 더 말랐다. 개미허리에 이어 개미 다리가 된 것이다. 창백한 피부 한 꺼풀 아래로 푸른 혈관이 몇 줄 쉭쉭 지나간다. 그 파란 정맥이 개미와 민재의 유일한 차이였다. 꼭 피가 쪽 빨린 개미 같았다. 더 시간이 지나면 말라비틀어진 개미가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다.
명석은 대학원생이 된 민재와 군인이 된 정현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넣어보며 이리저리 가늠해 보았다. 단순하게는 헝클어진 더벅머리냐 빡빡이냐, 더 깊게는 개미지옥에서 헤엄칠 것인가 아니면 연병장에서 구보를 뛸 것인가의 문제였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명쾌해지기는커녕 끈적이는 것들이 목 밑에서부터 차올랐다.

이럴 바엔 담배를 피우자.

확실히 담배는 피우기 위한 것이었다. 불을 붙이고 지켜보기만 할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밝게 타올랐다. 거뭇해진 흡연자의 폐사진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연기가 착 달라붙는 듯한 폐의 이미지와 달리 머리는 맑아졌다. 껌껌했던 앞날들은 반투명해졌고 입김 한 번에 송송 구멍이 나 사라져 버렸다. 군대에 있는 정현이도, 랩실에 다니는 민재도 명석과는 동떨어진 이야기가 되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는 몸 안으로 타고 들었고, 기분도 덩달아 들떴다.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지영이는 이제 아예 끝났고. 19학번에 또 누가 있었지. 한 개비, 한 개비 피워나갈 때마다 이런저런 수업들에서 스쳐 지나갔던 동기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중에서 새로운 인연을 찾을 수 있으리란 희망도 차올랐다.
명석은 남은 담배들을 마저 태웠다. 주황색에 가까운 불꽃을, 눈이 아니라 입으로 그 열과 성을 느끼며. 마지막 개비는 특히 오래 물고 있었다. 꺼져가는 불빛 한 점마저도 다 삼키려는 듯 들이쉬곤, 몸 안의 후끈 차오른 열기를 길게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