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is egg (제4회 광주과기원 문학상 – 산문 당선작)

0
46

Life is egg

박현서(생명,24)

 

삶은 달걀이다.

 

툭 소리를 내며 냉장고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어젯밤 삶은 달걀을 담아둔 봉지였다. 달걀은 현대인에게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달걀흰자의 단백질 소화 흡수율(PDCAAS)은 최고점이다. 게다가 들고 다닐 수 있고, 냄새도 안 나고, 무엇보다 10분이면 삶은 달걀이 완성된다. 두어 개 챙겨 다니면 끼니 걱정도 없다.

허리를 숙여 달걀 봉지를 집어 들었다. 오늘 저녁으로 먹으려던 삶은 달걀들이 깨졌다. 봉지에서 조각난 껍질이 떨어졌다. 쪼그려 앉아 껍질 조각을 주워 모았다. 냉장고 밑으로 들어간 껍질을 주우려 애썼지만 뻗은 손은 닿지 않았다. 거뭇한 먼지만 묻어나왔다. 부엌 한쪽에 대강 기대어둔 빗자루를 집어다가 냉장고 밑을 쓸었다. 달걀 하나가 데굴데굴 굴러 나왔다.

 

*

 

어느 날 발등에서 혹이 자라났다.

 

되짚어보면 혹의 존재를 알아챈 건 그해 시월 즈음이었다. 시월은 가을 아니었던가. 시월이면 선선해질 법도 한데, 가을이 오는 건가, 하면 자꾸만 기온이 치솟았다. 그 주의 유독 더웠던 날 해가 붉은빛을 흩뿌릴 때쯤 어정쩡한 저녁을 먹으러 기숙사를 나섰다. 슬리퍼나 질질 끌며 걷는데 이상하게 그날따라 한쪽 발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원래 자기 슬리퍼라는 건 남들과 똑같은 삼선을 신어도 귀신같이 알아챌 수 있는 건데 그날따라 무언가 어색했다. 조금 끼는 것 같기도 하고, 발이 부었나 싶었다.

방으로 돌아와 컵라면에 물을 붓고 기다리다가 문득 발을 내려다보았다. 약간 붉은 것 같기도, 푸른 빛이 도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어디에 발등을 부딪쳤던가. 가만 바라보다 언뜻 검은 게 휙 지나갔던 것 같기도 하다.

 

혹은 점점 자라났다. 아니, 이걸 혹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주 서서히 자랐다. 크는 줄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약간 부은 듯한 발등 위에 흐릿하고 검은 반점이 나타났다. 잠시 멈추어 바라보면 알아챌 수 있는 그런 흐릿한 반점이었다. 병원에 가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병원에 가서 할 말도 병원에서 해줄 말도 없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근처에 갈 만한 병원이라면 정형외과인데 발등이 부어서 왔다니 엑스레이 좀 찍고, 소염제 처방해주고, 몇천 원 주고 그게 끝이겠지. 더 심해지면 가지, 뭐.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는 부은 듯한 발등과 흐릿한 반점 같은 건 어디 기억 저편에 구겨놓았다.

시월이 절반은 지나갔는데도 날이 더웠다. 여전히 반팔에 후드를 대충 걸치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녔다.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조별 과제를 하고, 도서관에서 중간고사 대체 레포트를 쓰고, 강의실에서 전공필수 시험을 봤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엎었고, 워드 파일을 pdf로 바꾸는 걸 잊었고, 삼십 분만에 흰 종이를 냈다. 여전히 반팔에, 후드에, 슬리퍼. 레포트가 하나 더 늘었고, 열람실은 발길을 끊었다. 7시 48분에 다시 울리는 알람, 두 시쯤 뜨는 인스타그램 알림, 저녁 먹기 직전이나, 직후, 혹은 종종 그 중간에 걸려 오는 전화벨 소리. 언제부터인가 그 모든 게 거슬렸다. 문제는 그 소리가 전부 내 소리는 아니었다는 거다. 하여튼 거슬리는 건 참을 수 없었고, 그걸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

 

서란 씨는 취미 없어요?

취미요? 음, 글쎄요…….

내가 이번에 독서 모임 시작했는데, 원래 인간관계론, 양자컴퓨터 이런 거나 읽다가 이야, 오랜만에 소설 하나 읽으니까 재밌더라고. 란이 씨는 책, 이런 거 좋아하는 거 없어요? 아니면 뭐, 어릴 때 음악 좀 했다든가.

책은 좀 읽는데, 음, 최근에는 이기적 유전자 읽기 시작했어요. 어릴 때 한 음악 같은 건 기억이 잘 안 나서…….

아, 책은 좋아해요? 소설은 관심 없고?

네에, 소설은 안 읽어요.

왜?

 

그러게요.

 

*

 

혹은 어느 날 한순간에 부풀어 오르더니 발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날은 룸메이트가 없는 방에 홀로 남아 종일 빈둥댄 날이었다. 침대에 엎드려 소설이나 읽으며 다리를 달랑거리고 있었다. 어깨가 아파 몸을 돌려 누운 채로 팔을 쭉 뻗어 소설책을 들었다. 그런데 그 사이로, 다리를 바닥으로, 팔을 기둥으로, 책을 지붕으로 한 그 틈으로 발이 보였다. 혹이 작은 달걀만 하게 부풀어있었다. 한창 흥미진진하던 소설을 내려놓을 정도로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상체를 일으켜 무릎을 끌어안고는 발을 가만 바라보았다. 혹은 그새 조금 더 부푼 것도 같았다. 건강한 달걀만 하게 부풀어 오른 그 혹은—여전히 이걸 혹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불투명했고 제법 단단해 보였다. 조심스레 손을 뻗었지만 손가락을 대면 펑, 하고 터질까 봐 아니면 어쩌면 영영 터지지 않을까 봐 무서웠다. 손은 차츰 가까워졌다. 그리고 손가락이 닿았을 때

데굴,

하고 굴러가 버렸다. 그대로 발등에서 떨어져나와 데굴데굴 굴러가 버렸다. 손끝에 닿은 촉감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고민 끝에 손에 쥐어보니 단단하고 미지근했다.

 

 

기숙사 짐을 빼는 건 생각보다 더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해 겨울 룸메이트는 나에게 이별을―다시는 너 같은 애랑 방 못 쓰겠다―고했다. 이삿짐 박스를 사서 짐을 욱여넣는 행위를 몇 번이고 반복해야만 했다. 그렇게 화장실을 비우고, 옷장을 비우고, 서랍을 비우자 책꽂이만 남았다. 책꽂이 한 칸을 가득 채운 소설을 몇 권 빼내는데 파열음이 들렸다. 잊고 있던 혹-달걀이 한순간에 데굴데굴 굴러떨어져 마침내 바닥과 조우한 것이다. 그리고 탄생.

 

깨진 달걀 껍데기를 가르고 태어난 것.

 

호문쿨루스는 플라스크 속 작은 인간. 그렇다면 달걀 속 작은 인간은 무어라 불러야 할까? 나와 같은 얼굴의 작은 인간은.

 

*

 

  1. 달걀을 세우는 방법은?
  2. 달걀 밑을 깬다.

 

오답

 

달걀을 깨지 않고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냥 세우세요.

 

*

 

달걀에서 태어난 그 작은 인간―혹은 인간의 형태를 띤 무언가는 빠르게 자라났다. 가리는 것 없이 잘 먹고 잘 자랐다. 왠지 밥을 챙겨줘야 하나 싶어서 작은 종지에 밥을 조금 퍼주었더니 밥풀 몇 알을 양손으로 들고 먹었다. 물도 몇 방울 떨어뜨려 주니 갈증이 가신 듯했다. 그렇게 매일매일 끼니를 함께 했다. 내가 세 끼를 먹으면 그도 세 끼를 먹었고, 내가 두 끼만 먹으면 그도 두 끼를 먹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 얼마 후에는 분홍색 플라스틱 스푼을 겨우 쓸 만한 크기가 되었다.

 

간장 좀 더 줄래?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건 한두 달쯤 지나서였다. 그의 일과는 묵묵히 밥을 먹고 자는 것 정도가 전부였기에 언제 말을 익힌 건지 신기했다. 말을 할 수 있다고 한들 그리 달라지는 건 없었다. 서먹한 가족이 오랜만에 저녁을 함께하듯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저기 휴지 좀. 어 그래. 프라이 더 먹을래. 조금만 더. 잘 먹었습니다.

 

……유튜브 같이 볼래?

 

다만 그가 말을 시작하자 어쩐지 의식되기 시작했다. 식사를 끝내고 상을 치우면 그는 대개 가만히 앉아 어딘가를 응시했고, 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소설책 몇 장을 뒤적였다. 전까지는 별생각 없었다지만 대화까지 나눌 수 있는데 하릴없이 가만있는 걸 두고 보자니 어딘가 불편했다. 베개에 적당히 휴대폰을 기대어두고 나란히 앉아 동영상을 시청했다. 그렇게 작은 혹-인간, 아니면 달걀-인간과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되었다.

 

*

 

콜럼버스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 콜럼버스는 달걀을 세웠다. 끝을 조금 깨뜨려 세우고는 의기양양하게 당신의 대단함을 말했다.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지 못한 것. 당신이 그걸 해냈다고. 사실 이 이야기는 거짓말이다. 진짜로 달걀을 깨서 세운 건 부르넬레스키다. 부르넬레스키의 위대한 업적 하나: 부르넬레스키는 달걀을 세웠다. 아주 거대한 달걀을 하나 피렌체에.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달걀은 깨져도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있다. 겉껍질이 깨져도 내막이 구조를 지지한다. 그래서 콜럼버스든 브루넬레스키든 달걀을 세우려고 달걀을 깨버린 거다. 달걀을 세우기 위해서는 딱 하고, 아니면 퍽 하고 달걀을 깨야 한다는 거다.

 

누군가 말했다: 알은 세계다.

 

중요한 건 그거다. 사실 이 이야기는 거짓말이다.

 

*

 

어느덧 삼월이었다. 그러니까 개강을 한다는 것이고, 학교에 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기숙사에서 살 때보다 30분은 더 일찍 일어나 버스를 타고 등교해야 했다. 아침이면 눈을 뜨기 싫었고, 밤이면 눈을 감기 싫었다. 눈을 뜨든 눈을 감든 새로운 하루가 점점 다가왔으니까. 강의는 지루하기만 했다. 뭐라는 거야. 점심 뭐 먹지. 오늘은 비엔나소시지를 좀 사 가야지. 딴생각만 하다가 강의가 끝나는 날이 허다했다. 꾸벅꾸벅 졸기도 했고, 세워놓은 태블릿으로는 유튜브를 봤다. 이와 상관없이 제출해야 하는 과제는 꼬박꼬박 나왔고, 중간고사 날도 착실히 다가왔다.

 

돌연변이가 뭐야? 전사랑 활성은?

 

이제 보통 숟가락을 제법 능숙하게 쓸 수 있게 된 그가 물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정보를 탐닉했다. 머릿속 공백을 채우고 싶은 것 같았다. 책장을 빤히 쳐다보는 일이 잦았다. 종종 모르는 단어를 물어왔고, 영상 속 사람들은 왜 웃는지 물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나. 이거 누가 나 대신 안 해주나. 나는 매일 그 생각을 했다. 좁은 자습실 책상에서 그 생각을 하던 내게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그거 대학 가면 괜찮아져. 대학 가면 실컷 놀아. 그거 대학 가면, 그 대학, 대학……. 그래서 대학을 갔다.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어중간한 성적. 네 성적이면 이 대학의 이 과가 안정인데 취업률이 이러하고, 저 대학의 저 과는 상향인데 저러하고……. 그래서 그 대학의 그 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탁 트인 캠퍼스와 두 명짜리 기숙사 방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거 누가 나 대신 안 해주나. 과제도, 수업도 누가 나 대신 해줬으면. 적당히 성적 맞춰 온 적당한 대학의 적당한 과에 다니며 그 생각을 하던 내게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그거 아직 낯설어서 그래. 그거 처음이라 그래. 그래서 일 년을 꼬박 다녔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거 누가 나 대신 안 해주나.

기숙사 짐을 빼던 날, 부모님이 차를 끌고 학교까지 왔었다. 나는 짐을 한 아름 들고 기숙사 방과 차를 몇 번 오갔다.

글쎄, 얘가 잘 적응을 못 하는 거 같네. 응, 응. 전에 그 대학의 그 과 다니지. 더 높은 데도 쓸 수는 있었는데 아무래도 거기는 좀 그렇잖아. 얘가 수학을 못 해서. 응, 응. 그래 책은 좋아하지. 근데 책 좋다고 문과를 보낼 순 없잖니, 요즘 같은 때에는. 어, 그래, 들어가고, 나중에 또 전화할게. 응, 응.

 

아마 그는 나와 같은 사람일 거다. 나와 똑같이 생겼고 명백히 나로부터 나온 존재이니까. 아마 유전자가 똑같지 않을까. 그렇다면 부모님보다도 가까운 거겠지.

 

그는 빨리 자란다. 아마 며칠 뒤면 한 뼘쯤 더 자라 있을 거다. 주먹만 한 달걀에서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아 일 미터 정도가 되었으니까. 그는 얼마나 더 자랄까. 나랑 똑같을까, 아니면 더 크거나 작을까.

 

삼월이 된 후로는 그의 일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내가 밥을 차려놓고 나가면 그걸 먹고, 무언가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내가 돌아오면 다시 밥을 먹는다. 뭐, 하는 일이 특별히 없는 것 같다. 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하는 일이라곤 밥 먹는 것밖에 없는 듯하다.

 

그래서 그는, 달리 할 일 없는 그는 곧 내가 될 거다.

 

*

 

서란!

어느 날 서 씨가 외쳤다. 옆자리에 부른 배를 안고 앉아 있던 이 씨는 찌푸린 얼굴로 서 씨를 돌아봤다. 서 씨는 득의양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씨는 그 얼굴을 보곤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서 씨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때면 좋을 게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 뺀질한 얼굴을 봤던 기억을 더듬던 이 씨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서 씨는 그런 이 씨의 시선 따윈 전혀 못 느꼈다는 듯 가속페달에 올린 발에 기분 좋게 힘을 주었다. 차장 밖 풍경이 한결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중요한 건 길(道)이 아니야. 물처럼 흘러가듯 사는 게 중요한 거지. 강처럼, 바다처럼. 사람도 흘러야 해. 길에 갇히면 안 되는 거라구.

 

徐道瀾 서도란

徐 瀾 서 란

 

작명소까지 가서 받아 온 이름의 절반을 홀라당 내다 버린 이유가 그것이었다. 도란, 도란, 하다가 란. 이 씨는 분노했다. 애써 손품 팔고 발품 팔아 작명소 찾아다 이름 받아오는 동안 가만있다가 인제 와서 말 같지도 않은 말 한다며 얼굴을 붉혔고, 삿대질하며 언성을 높였다. 이 씨는 체념했다. 침이 튀도록 화를 내도 서 씨는 빙글빙글 웃으며 란, 란, 서란, 하고 말았다. 아무 말 않고 두나, 열을 내나 서 씨는 여전했다. 그러다 일주일쯤 지나면 슬그머니 소파에 앉은 이 씨한테 엉덩이를 붙여왔다.

요즘 작명소 그거 별 의미 없다니까? 다 미신이고 부질없어. 제 배 불리겠다고 아무 이름이나 가져오는 건지 사흘 밤낮 머리 싸매고 지은 이름인지 어떻게 알겠어. 란이, 이거는 이 아빠가 다 생각해서 지은 거야. 저번에 말해줬듯이 길보다는 물이 중요한 거야.

 

물은 흐르고 흘러 강이 되고 호수가 되고 바다가 된다. 강과 호수와 바다는 수증기가 된다. 수증기는 다시 물이 된다. 얼음 알갱이와 만나 구름이 된다. 구름은 비가 된다. 비는 흐르고 흘러 강이 되고 호수가 되고 바다가 된다.

 

*

 

마음을 먹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책상과 책장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좁은 방에 책장까지 둔 건 확실히 욕심이었다. 책상에도 자그마한 책꽂이 같은 것이 딸려왔지만 고집을 부려 큰 책장까지 하나 더 두었다. 덕분에 안 그래도 비좁은 자취방에 겨우 두 사람이 몸을 누일 만큼의 공간만 남았다. 책장을 두었지만 책상 위에는 온갖 책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빌려온 책, 새로 산 책, 갖고 있던 책 혹은 소설책과 시집, 전공서 따위가 제법 높은 더미를 이루고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책상 여기저기에 흩어져있었다. 방에 있는 책을 전부 모아 바닥에 탑을 쌓고 나서 분류 작업에 들어갔다. 일단 문학과 문학이 아닌 책을 나누어 쌓았다. 후자는 차례로 책상 위 책꽂이에 꽂혔다. 그러나 아직도 책이 한 무더기 남아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심혈을 기울여 분류를 시작했다. 책을 한참 고르다가 전부 섞어버리고 다시 기준을 정하기도 했다. 겨우 책을 골라 책장에 꽂았다가도 이리저리 다른 칸으로 책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을 책과 씨름해 삼 분의 이쯤 책을 정리하고 나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무릎을 안은 채로 침대에 앉아 나를 보았다. 그는 며칠 새 또 키가 자라 이제 눈높이가 거의 같은 정도였다. 나도 그를 마주 보았다.

너는 서란이야.

서란?

아니 서란이.

서란 2호라는 뜻으로 서란이. 여전히 눈에 띄는 이름이긴 마찬가지였지만 어딘가 만족스러웠다. 남들처럼 세 자리 차지할 수 있다는 게 무의식적인 안정감을 주는 듯했다.

 

이름까지 정해주었으니 이제 시작이었다. 란이를 제대로 교육해야만 했다. 나를 단순히 대신하는 게 아니었다. 더 잘 해내길 원했다. 다음 학기가 시작되기 전까진 모든 걸 끝내고 싶었다. 마음 같아선 하루빨리 란이를 대신 내보내고 싶었지만, 사회적으로든 학업적으로든 유치원생이나 마찬가지인 지금 같은 상태로는 무리였다. 먼저 중요한 교육부터 시작했다. 란이는 나와는 다른 길을 가야 했다.

 

읽으면 안 돼.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전부 안 돼.

응.

이것 말고도 소설은 절대 읽으면 안 돼. 단편이든 장편이든 뭐든 소설은 안 돼.

응.

아, 그냥 시 금지, 소설 금지, 희곡 금지. 문학은 전부 안 돼.

응.

 

읽으면 안 돼.

 

응.

 

다음으로는 대강 십 년 치 정도가 밀린 수학 과학 진도였다. 처음에는 초등학교 수준부터 가르쳤다. 간단한 덧셈과 뺄셈, 곱셈과 나눗셈은 금세 깨우쳤다. 란이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는 말이 꼭 맞는 우수한 학생이었다. 다만 문제는 나는 우수하지 못한 선생이자 학생이었다는 것이다. 중학교 과정까지는 인내심을 가지고 가르쳤지만, 고등학교 과정부터는 슬슬 힘에 부쳤다. 결국 교과서나 참고서를 몇 개 구해다 주고 무료 인터넷 강의를 틀어주었다. 나중에는 전공서만 겨우 주었다. 란이는 아주 우수한 학생인지라 군말 없이 내 교육을 따랐고, 공부 중에 생기는 질문 같은 건 알아서 해결했다. 집에 돌아오면 늘 란이가 전공 책을 팔락이고 있었고, 그 옆에는 무언가 빼곡히 적힌 A4용지나 노트 따위가 여럿 놓여 있었다. 매일 같이 하루를 허비하고 돌아온 나는 그런 모습을 마주했다.

 

9월이 되자 개강이 찾아왔다. 처음으로 완전히 나를 대신할 란이를 내보냈다. 란이는 청바지에 검은 티를 입고 가방을 맨 모습으로 집을 나섰다. 두 달 전의 내가 집을 나설 때와 거의 똑같은 모습이었다. 감쪽같았다. 나와 같은 얼굴에 같은 키. 목소리도 같았다. 시험 삼아 노래를 부르면 아마 똑같은 목소리가 겹칠 거다.

란이는 내 역할을 아주 잘 수행했다. 매일 성실히 등교해 수업에 열중했다. 매주 빼곡한 필기가 쓰인 수업자료가 늘어만 갔다. 시험을 앞두고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새벽까지 시험공부를 했다. 과제도 빼먹지 않았다. 매주 내야 하는 과제를 꼼꼼히 챙겼고, 레포트도 수준급으로 써냈다. 과제에 대한 코멘트는 칭찬 일색이었다. 풀이가 깔끔하네요. 훌륭합니다. 주제도 명확하고 근거들도 잘 제시했네요. 짜임새 있는 글이에요. 훌륭합니다. 나는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학기 말 성적표에도 정말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것들이 찍혀있었다. 얼떨떨했지만 웃었다. 고개를 돌리니 란이도 같은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꼬리가 수평을 이뤘다.

 

*

이건 뭐예요?

지난주 학회에서 받은 건데, 뒤에 씨앗이 들어있어서 심으면 꽃 같은 게 자라는 거래요.

 

안녕하세요. 여기 씨앗 연필 파나요?

씨앗 연필이요? 잠시만요. C1이라 써있는 곳 맨 아래 확인해보세요.

 

해바라기, 코스모스, 나팔꽃, 바질, 상추, 토마토, 당근, 그리고 랜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

 

란이는 내 생활에 완벽히 적응했다. 란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 나는 새로운 생활을 꾸렸다. 책상과 책장, 침대로 꽉 찬 좁은 방에서, 자그마했던 란이가 종일 지냈던 그 좁은 방에서 하루를 보냈다. 핸드폰과 태블릿, 노트북은 전부 란이가 들고 나갔기에 할 수 있는 거라곤 책장에 꽂힌 책을 읽는 것뿐이었다. 사놓고, 혹은 빌려놓고 쌓아 두기만 했던 책을 한 권씩 차례로 읽기 시작했다. 한 달쯤 지나자 방에 있는 책을 전부 다 읽었다. 이 주쯤 더 지나자 모든 책을 한 번 더 읽었다. 서너 번 더 읽을까 하다가 란이에게 대출을 부탁했다. 읽고 싶던 책을 골라 란이에게 알려주면 그날 저녁에 빌려다 주었다. 늘 미루기만 했던 책들을 읽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토지 같은 것들이었다. 나중에는 문학 서가에서 아무거나 최대한 많이 빌려달라고 했다. 란이는 묵묵히 일, 이주마다 열 권 남짓한 책들을 빌려다 주었다. 아침보다는 지친 얼굴로 어깨에는 전공 책이 든 백팩을 메고, 한 손에는 소설을 담은 가방을 들고 작은 방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은 양손에 책을 들고 돌아왔다. 가방이 뜯어졌어, 하고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란이는 책상에 책을 올려놓고는 말없이 씻고 자리에 누웠다. 그다음 주에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대출이 안 된대, 하고 입을 열었다. 지난번 가방이 뜯어졌을 때 오는 길에 책 한두 권을 흘린 것 같았다. 오는 길에 바닥을 유심히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란이는 말했다. 대출대 사서가 꼬박꼬박 대출 가능한 권수를 꽉 채워 빌리고 반납하던 란이가 모자란 권수를 반납하는 걸 보고는 의아하게 여겨 사정을 물었다. 사서는 연체라면 풀어주겠지마는 분실은 다르다며 눈썹으로 팔자를 그렸다고 했다. 그 후로는 직접 책을 읽으러 다녔다. 운동화에 모자를 눌러쓰고서 학교와 정반대 방향에 있는 공립 도서관을 향했다. 오랜만에 꽤 먼 거리를 걸으니 돌아올 때는 발바닥이 다 아팠다. 그래도 날이 밝으면 다시 운동화를 신고 모자를 썼다. 도서관에 들어서면 망설임 없이 800번 서가로 향해 되는 대로 열 권쯤 책을 골랐다. 그러고는 아무 빈자리에나 앉아 골라온 책으로 탑을 쌓고 읽기 시작했다.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서면 저녁때가 다 되어 돌아왔다.

 

어느 날 문득 맨 위 칸에 손을 뻗다가 이상함을 느꼈다. 손이 닿지 않았다. 손을 펼쳐 가만 들여다보자 소매가 손바닥을 반쯤 덮고 있었다. 빈 책상에 들고 있던 책을 아무렇게나 내려두고는 거울을 찾아 나섰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니 죄다 어딘가 품이 큰 듯한 차림이었다. 거울을 조금 더 바라보다가 다시 돌아왔다.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지만 이내 가져온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늘 그랬듯 탑처럼 쌓은 책더미를 한 권씩 읽어나갔다.

날이 갈수록 키가 작아지는 게 느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몸 전체가 작아지고 있었다. 바지가 바닥에 질질 끌려 흙탕물로 축축해진 날, 옷장을 뒤져 아무렇게나 둔 작아서 입지 않던 옷을 찾아냈다. 그리고 다음 날 도서관으로 향했다. 하루는 도서관에서 신발이 벗겨지며 넘어졌다. 주문 실수로 한 치수 작아 발이 아프던 운동화를 찾아 신었다. 뒤꿈치에 손가락이 들어가고도 남았지만. 두 다리 멀쩡히 걸을 수만 있다면 아침에 나가 저녁때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러나 몸은 계속해서 작아졌고 가는 데 걸리는 시간만 끊임없이 늘어났다. 결국 어린 학생이 어려운 책을 읽네, 학교는 쉬는 날인가 봐, 하는 말을 들은 날을 끝으로 다시 집안에 박혀 지내는 생활로 돌아갔다.

다시 돌아온 조그마한 방에서의 낮은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방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 몇 권을 뽑아 몇 장 넘겨보았다. 옆으로 툭 튀어나온 인덱스도 손가락으로 훑었다. 인덱스를 붙여가며 책을 읽었던 게 꼭 전생 같기도 하고, 일주일 전 같기도 하고, 어제 일 같기도 했다. 가만 앉아 벽 한구석에나 시선을 두었다. 깊은 생각에 빠지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그렇게 있다 보면 해가 기울었다.

그러던 어느 날 펜을 들었다. 매끈하게 빛나는 검은 곡선의 펜 하나, 그리고 빈 노트를 집어 들었다.

 

*

 

4장 DNA와 생명 중심 원리

 

DNA는 서로 상보적인 가닥으로 이루어진 이중나선 형태이다. 이 두 가닥은 염기쌍 사이의 수소결합을 통해 안정화된다. 또한 한 가닥이 손상되더라도 다른 가닥의 서열을 이용해 보완할 수 있다.

DNA의 한 가닥 주형(template)으로 사용하여 상보적인 RNA를 합성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전사(transcription)’라고 불리며, 만들어진 RNA를 전령 RNA(messenger RNA), 즉 mRNA라고 한다.

mRNA의 염기서열은 3개씩 묶어 읽을 수 있다. 이를 ‘코돈(codon)’이라고 하며, 각 코돈은 하나의 아미노산을 지정한다. 코돈을 읽어 아미노산으로 단백질을 합성하는 과정을 ‘번역(translation)’이라고 한다. 예시를 한 번 살펴보자.

 

 

주형 가닥: 5′-ACCACCTTCAGAAATTTCAAAAATAAG-3′

mRNA: 5′-CUUAUUUUUGAAAUUUCUGAAGGUGGU-3′

아미노산: Leu-Ile-Phe-Glu-Ile-Ser-Glu-Gly-Gly

 

 

아미노산은 3문자 또는 1문자 약어로 나타낼 수 있다. 위 예시는 3문자 약어를 사용하여 나타낸 것이다. 1문자 약어를 사용하여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텅 빈 종이가 형광등 아래서 하얗게 빛났다. 펜을 들었지만 막상 쓸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는데도 내가 쓸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전부 남의 글이었다. 마지막으로 글을 쓴 게 언제였더라. 책상에 놓인 책을 아무렇게나 펼쳐 베끼기 시작했다. DNA, 단백질 따위나 세계사 이야기 같은 것들. 되는대로 책을 펼쳐서 나온 부분을 그대로 베끼기도 했고 중간에 하고 싶은 말을 끼워넣기도 했다. 누군가의 소설을 옮겨쓰다가 떠오른 기억 한 장면을 끄적였고, 어디서 읽었는지 모를 시 한 구절을 집어넣었다. 어느 날은 과거를 떠올렸고, 어느 날은 미래를 기록했다. 노트는 이런 두서없는 글로 점차 빼곡히 채워졌다. 길을 잃었다기보다는 길에 오른 적도 없는 그런 조각들로.

침대에서 일어나면 얼굴에 찬물을 대강 묻히곤 책상에 앉았다. 날이 갈수록 겨우 기어오른다는 말이 더 어울리긴 했다. 바지가 흘러내려 티셔츠 한 장만 걸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티셔츠마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수건을 둘러 묶은 채로 방을 돌아다니는데 그게 꼭 철학책 삽화 속 그리스 철학자 같아 그날은 노트 한 구석에 삽화를 따라 그린 낙서를 조금 끼적였다. 며칠을 철학자처럼 지내다가 란이가 잠시 입었던 인형 옷을 찾아냈다. 금방 키가 커져 일주일도 채 입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걸 걸치고 책상에 앉아 연필을 들었다가 때로는 침대에 앉아 몇 시간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란이가 돌아오면 간단한 끼니를 함께 했다. 주로 달걀프라이나 비엔나소시지 따위를 노릇하게 구워 흰 밥과 먹었다. 분홍색 스푼이 남아있어 다행이었다.

 

*

 

나를 알에 넣어줬으면 좋겠어. 어떤 사람은 알에서 태어났대. 나는 그러지 못했으니까 알에 넣어달라는 거야. 그리고 흙을 채운 화분에 넣고 흙을 덮어서 다독이는 거지. 언젠가 꼭 그래보고 싶었거든. 그리고, 그리고 또 어느 날엔 싹이 자라나면 좋겠어. 뭐가 좋을까. 이왕이면 열매가 달리는 게 좋을 텐데. 동그란 열매로 말이야.

 

*

 

얼마나 더 작아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그 정도가 일정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작아지고 있었다. 누군가 부지런히 깎는 몽당연필이 된 기분이었다. 이러다가 씨앗만 해질까? 이대로라면 복숭아씨나 자두씨랑 비슷해질 것 같은데. 수박씨만 해지면 어쩌지? 딸기씨는? 그리고 또 아주아주 작아지면 반점이나 온점만 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노트에 점을 몇 개 찍어두었다. 여기를 펼쳐 두고 키를 재봐야겠다, 하고 종이 위에 드러누워 생각했다. 생각은 꼬리를 물었다. 하염없이 꼬릴 물고 물다가 오늘 저녁은 오랜만에 삶은 달걀을 먹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다.

기울어가는 해가 한 줄기 햇살을 뿜었고, 다소 따갑고 따듯하게 눈을 찔렀다. 역시 삶은 달걀은 저녁보다는 아침에 어울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며 뉘었던 몸을 느릿느릿 일으켰다. 펜 대신 연필을 들어 올려 연필깎이에 꽂아 넣고 온몸으로 힘껏 돌렸다. 잠시 헛도는 듯하더니 심이 뾰족하게 갈렸다. 몽당연필이라 부를 만한 길이였다. 곧 씨앗을 뿌릴 때였다.

 

*

 

온점만 해져도 몸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을까.

분자를 부수고 조립하고 복제할까.

그러면 여전히 유기체겠구나.

여전히 삶이겠구나.

그런데 그건,

 

*

 

저녁이나 먹자.

 

*

 

깨진 달걀은 전부 껍데기를 깠다. 매끈해진 달걀은 오늘 먹을 양만 접시에 담고 나머지는 반찬통에 담았다. 껍데기만 남은 봉지로 손을 향했다. 껍데기는 안쪽에 붙은 얇은 막을 조심스레 떼어내어 모았다. 달걀 껍데기에는 식물에 필수적인 칼슘이 풍부하다. 막을 제거한 껍데기는 바짝 말린 후 부수어 비료로 쓸 수 있다. 이미 신문지 위에 이렇게 말리고 있는 껍데기들이 제법 있었다. 방금 나온 껍데기를 그 옆에 펼쳐 두고 잘 마른 껍데기를 한 움큼 집어 화분에 뿌렸다. 화분에서는 방울토마토가 제법 그럴듯하게 자라 열매를 맺고 있었다. 몇 개 달걀에 곁들이면 좋을 것 같아 동그란 토마토를 몇 알 땄다.

간단히 식사를 해결하고 나서 책장 앞에 섰다. 비좁은 자취방부터 지금의 집까지 한쪽 벽은 늘 책장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사를 할 때마다 꼭 같은 자리에 그대로 책들을 꽂았기에 책장 앞에 서면 비로소 내 집이라고 느껴졌다. 허리를 숙여 맨 아래 꽂힌 노트를 한 권 꺼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습관처럼 노트를 채웠고, 또 읽고 있었다. 어제 쓴 글을 살피다가 몇 글자에는 두 줄을 죽죽 그었다. 오늘 무얼 쓸까, 검은 펜을 톡, 톡, 톡 두드렸다. 무의미한 곡선과 직선 몇 줄, 찌그러진 방울토마토 하나도 그려 넣다가 문득, 아직 식탁에 놓인 달걀들을 보았고, 무엇을 쓸지 알았다. 펜을 고쳐잡고 손에 힘을 주어 눌러썼다.

 

삶은 달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