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콘텐츠와 느린 식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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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너무 좋았던 작품이나 몇 번이고 돌려본 영화나 소설이 있는가? 처음 본 이후로 몇 번이고 다시 구매한 영화를 다시 재생해 놓고 본다든지, 같은 책을 넘기는 끝부분이 닳도록 몇 장이고 계속해 넘겨본 기억 말이다. 아니면 좋았던 구절을 계속 곱씹어 이제는 외울 지경이 되었다든지. 어렸을 때 보았던 작품은 유독 더 기억에 남는 듯하다. 지금도 왠지 어렸을 때의 향수에 젖으면 숙제하며 틀어두었던 ‘마당을 나온 암탉’ 영화가 떠오른다. 원작인 소설과는 달리 어린아이들에게 맞게 각색된 그 애니메이션을 볼 때면 청둥오리인 ‘초록이’가 암탉 ‘잎싹’의 곁을 떠나는 마지막 장면에 눈물이 나지 않기가 힘들다. 이처럼 선명히 기억하는 작품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기억이나 성격 혹은 평소에 말하는 것에도 체화되어 깃들게 된다. 몇 번씩은 같은 작품을 돌려보았다면 기억에 남지 않기도 어려우니 말이다.

 

그런데 요즈음 어렸을 때 본 작품처럼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몇 번씩 같은 구절을 곱씹게 되는 작품이 그다지 많이 남질 않는 것 같다. 사실 작품성이나 퀄리티로 따지면 그 시절에 본 아동 애니메이션보다 더 정교한 것들을 보고 있는 것임에도 그렇다. 물론 개중에는 분명 몇 년 후에도 기억에 남아있는 작품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가 빠르게 묻혀 사라지고 다음의 작품을 찾아 소비한다. 시간이 지나고, 성인이 되어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콘텐츠 역시 제약 없이 접근할 수 있으니 소위 ‘도파민 넘치는’ 콘텐츠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난다. 최근에는 심지어 그보다도 더 짧아져 1분 내지 그 이하의 영상들, 릴스와 숏츠로 만들어진 콘텐츠까지 수없이 나온다. 이것들은 정말로 물 흐르듯 순식간에 소모하곤 하니 그 중에 한 달 뒤에도 물어 기억에 남는 인상적이었던 것을 고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왜일까? 그 의문에 대해 최근 양산형 콘텐츠의 퀄리티나 내용 전개 측면의 차이를 들기엔 사실 옛날의 콘텐츠들도 그리 퀄리티가 좋지 않은 것들은 많았다. 내가 기억에 남는 영화로 꼽았던 ‘마당을 나온 암탉’ 역시 소설에 비해 미흡하다든지, 전문 성우가 아니었다든지 그런 비판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나에게는 기억에 뚜렷한 영화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에 대해 어쩌면 속도가 문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콘텐츠가 나오는 속도, 콘텐츠를 소모하는 속도. 유명 작품이 대화의 주요 화제가 되고 여러 심도깊은 고찰이 나오기도 전 작품은 갈기갈기 해부되어 콘텐츠가 되고 밈이 되어 소비된 뒤, 그 다음은 어느 정도 지나면 다음의 작품에 대한 화제로 옮겨간다. 한참 <서브스턴스>를 동아리 선배와 보러 가던 때가 불과 24년 말이었던 것 같은데, 25년 상반기가 지나가는 사이 <미키17>며 <콘클라베>며 끝없이 새 작품이 화두에 오른다. 하반기에는 무슨 작품이 지나갔는지도 바쁜 일정에 치여 기억이 안나던가. 작품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찾기는커녕 주변인들이 본 것만 보자고 생각해도 볼 것들은 장르를 불문하고 정말 끝이 없다. 친구들과 대화할 교양에 가까운 정도만 채우려 해도 나는 이미 실패한 셈이다. 너 그거 본 적 있어? 아니. 갈수록 교양이 쌓이는게 아니라 사라지는 기분이다.

 

그래서 속도가 문제라는 것이다. 음식은 소화할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리 소화가 빠른 사람이라 한들 한두 시간은 필요할 것이다. 이미 위장이 찼는데 더 음식을 밀어 넣어봤자 체한다는 결과밖엔 없다. 영화나 소설도 사실 그 정도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작품을 곱씹고 의미나 장면에서의 묘미를 파악하며 진정 즐기려면 읽을 당시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셈이다. 그런데 거기다 봤던 작품을 다시 깊게 고민해 보긴커녕 금세 다른 콘텐츠가 쌓이니 소화가 될 턱이 있나. 영화가 아니라면 소설, 소설이 아니면 웹툰, 웹툰이 아니면 드라마… 대신 콘텐츠들은 ‘체하기’대신 금세 다른 화제로 넘어가 버리는 방식으로 사라진다. 기억에 남기보단 그때 재밌었던 작품으로 그친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너무 빠르게 지나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너무나 빨리 지나가기에 엉성하게 만들어진 작품이래도 받을 수 있는 감명이나 깊이를 채 음미하지 못한 채 단지 오락과 여가 이상을 벗어나기가 힘든 것은 아닐까. 계속해 새 작품을 대중적 흐름에 맞춰 소비하기보다도 한 번씩 이전에 보았던 작품을 다시 돌려보거나, 나왔던 장면을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작품을 더 깊게 즐겼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 당신의 기억에 남는 영화나 소설은 무엇인가?

조시현 (화학,22)

사진 제공 = 조시현 (화학,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