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동백꽃이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매년 겨울, 온 제주를 붉게 물들이는 동백의 꽃잎 안에는 제주 4.3 사건의 정신이 겹겹이 싸여있다. 빗발치는 총성 아래 자유를 부르짖으며 쓰러지던 사람들. 70년 전 그때, 4·3의 영혼들은 동백보다 붉은 피를 흘리며 차가운 땅으로 소리 없이 스러져갔다.
제주 4·3사건이 올해로 70주년을 맞는다. ‘4·3특별법’에 따르면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해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사태와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양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많은 인명피해를 낳은 사건으로, 당시의 제주는 지금의 아름다운 제주와는 거리가 멀었다.
피로 고립된 섬, 제주
해방 이후 남한은 미군정1) 아래 합법적인 정부가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제적이고 권위적인 미군정에 반감을 가지는 제주도민들이 많아지던 1947년 3월 1일, 합법 정부의 설립을 목적으로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자’라는 구호를 내세운 시위가 벌어졌다. 3만 명의 제주도민을 동원한 이 시위는 경찰 발포사건으로 이어져 이후 제주도를 피로 뒤덮을 참극의 발단이 됐다.
시위 도중 기마 경관의 말발굽에 치인 어린아이를 보고 군중들이 돌을 던지고 야유하며 경찰서까지 경관을 쫓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이 비무장 상태의 군중을 상대로 총을 쏴서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은 것이 경찰 발포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통일국가를 주장하는 좌익과 미군정 체제를 지지하는 우익 간 갈등은 더욱 심화됐다.
통일조국을 설립할 것을 주장하던 남조선노동당2)은 이러한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1948년 4월 3일, 결국 남조선노동당의 무장대는 제주도 내의 경찰지서를 공격하면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 일로 경찰 4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정부는 무장봉기를 진압하려 노력했고, 무장봉기를 ‘빨갱이들의 선동으로 이루어진 무장폭동’으로 규정했다. 이로 인해 남조선노동당과 정부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1948년 10월 17일, 정부는 남조선노동당의 무장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해안선 5km 이외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은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 포고문을 시작으로 1949년 3월까지 남조선노동당 제주도당의 무장대에 대한 정부 토벌대의 강경진압작전이 전개됐다. 이 기간 동안 무장대와 토벌대에 의해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토벌대는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주민들을 폭도로 간주해 학살했다. 토벌대는 총살자 가족에게 총살당하는 사람을 보게 하며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 처형 대상인 사람이 없자 그 사람의 가족을 데려다가 대신 죽여버리는 ‘대살’과 마을주민들을 모아놓고 학살을 벌이는 ‘관광총살’도 빈번했다. 주민들을 대상으로 사살 연습을 벌이기도 했다. 학살을 피해 마을을 탈출한 사람들은 한라산 인근을 떠돌아다니면서 동굴이나 숲에 숨어야 했는데, 군경토벌대는 이런 사람들까지도 색출해 학살했다.
강경진압작전 이후에도 민간인 희생은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좌익 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과 반정부혐의자들을 단속했고, 많은 민간인이 총살당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통행 금지된 지역이 전면 개방됨으로써 제주 4·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제주 4·3사건의 기간 동안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 1이 넘는 3만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70년 동안 진행 중인 4·3 진상규명
4·3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수십 년간 제주 4·3사건은 ‘폭동’으로 불렸다. 실제로 전두환 정부 때 교과서는 4·3사건을 ‘제주도 폭동 사건’으로 지칭하며 “공산 무장 폭도가 봉기하여 국정을 위협하고 질서를 무너뜨렸던 남한 교란 작전 중의 하나”라고 서술했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시민단체와 학계를 중심으로 관련 서적과 증언, 연구결과가 잇따라 발표됐고,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의 강경 진압에 초점을 맞춰 4·3사건을 민중항쟁,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했다.
4·3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들은 지난 2000년 ‘4·3특별법’ 제정, 2003년 정부의 ‘4·3 진상조사보고서’ 발표, 그리고 같은 해 대통령의 공식 사과로 이어졌다.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라며 최초로 정부 수반으로서 4·3에 대해 공식으로 사과했다.
2014년 3월에는 ‘4·3희생자 추념일’이 신규 지정되기도 했다. 같은 해 4월3일 열린 추념식에는 여야 정당 대표를 비롯해 희생자 유족과 시민 1만여 명이 참석했다. 2018년 현재에도 ‘희생자와 유족들의 명예회복과 치유, 피해구제, 불법재판 무효화, 명예훼손에 대한 처벌’을 주 내용으로 하는 ‘4·3특별법 개정안’을 논의하고 있으며 4·3진상규명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4·3 사건을 알리려는 다양한 노력
정부의 탄압으로 문화·예술 작품에서 4·3사건을 다루는 것은 오랫동안 금기시돼왔다. 실제로 4·3사건을 다룬 소설인 현기영 작가의 ‘순이삼촌’은 당시 금서가 됐다. 하지만 4·3사건을 다룬 작품들이 계속해서 나왔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4·3사건을 다룰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됐다.
미술 분야에서는 강요배 화백의 그림이 대표적이다. 강요배 화백은 ‘동백꽃 지다’라는 작품으로 4·3사건의 참혹함을 대중들에게 전했다. 2013년에는 ‘지슬’이라는 독립영화가 만들어졌으며,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4·3사건을 알리기 위한 단체들의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제주 4·3평화재단은 추가 진상조사, 유족 복지사업, 4·3관련 문화·학술사업 등 지속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제주 4·3평화 공원을 운영하여 4·3사건의 진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다. 제주 4·3평화공원은 기념관과 전시관, 홍보영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4·3사건을 홍보하고 있다.
오는 4월 3일에는 제주 4·3평화공원에서 4·3 희생자 추념식이 열린다. 제주도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전국에 있는 분향소를 통해 추모에 참여할 수 있다. 전국 분향소 추모제는 4월 3일부터 5일까지는 진행되고, 4월 7일에는 4·3사건 70주년을 기념하는 광화문 국민문화제가 열린다.
기억해야할 아픔
이러한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은 사람들이 4·3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제주도민을 제외하고는 4·3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고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역사 교과서에서는 두 세 문장으로 언급만 돼있을 뿐이다. 4·3사건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제각각이다. 항쟁으로 보자는 관점이 있는가하면 단지 학살에 불과하다는 관점도 있다.
하지만 4·3사건이 항쟁인지 학살인지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은 무고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는 사실이다. 정확한 진상규명을 통해 4·3 사건을 이해하고 알리는 것이 우선이다. 4·3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현재까지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없었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도 뒤따르지 않았다. 제주 4·3사건은 분명한 우리의 역사이며 기억해야할 아픔이다. 끝나지 않은 4·3사건을 해결하는 일의 첫걸음은 기억하는 것이다. 이번 4월에는 동백꽃을 바라보며 4·3사건을 기억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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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군정: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삼팔선(한반도 북위 38°선) 이남 지역에 미군이 진주하여 9월 8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되기까지 3년 동안 실시한 군사통치.
2) 남조선노동당: 1946년 11월 서울에서 결성된 공산주의 정당으로 줄여서 남로당이라고도 함.
이건우 기자 rjsdn4497@g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