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적 관심에도 여전히 나아진 것 없는 ‘을’의 삶
‘다산 신도시 실버택배 비용은 입주민들의 관리비로 충당해야 합니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온 한 의견이 청원 시작 한 달 만에 30만 명이 넘는 인원의 참여를 받았다. 청소년 보호법 폐지에 관한 청원이 29만여 명, 미세먼지에 대한 청원이 27만여 명의 참여를 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건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매우 뜨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작 한 아파트 단지 내에서의 택배 배송에 대한 문제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길래 이토록 많은 국민적 관심을 받는 걸까.
‘갑질’ 논란, 입주자 권리는 어디까지?
다산 신도시 택배 대란은 지난 4월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 신도시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시작됐다. 입주민들은 후진하던 택배 차량으로 인해 어린아이가 다칠 뻔한 사건을 이유로 들어 택배 차량의 단지 내 출입을 금지하고 지하 주차장 이용만 허용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택배 업체의 차량은 2.1m의 높이 제한이 있는 지하 주차장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에 택배 기사들은 단지 정문에 택배를 쌓아놓고 직접 찾아가라며 대응했다. 하루에 200개 이상의 택배를 배송해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택배 기사들의 입장에서는 아파트 단지 하나에서 차량 없이 물품을 운반하며 많은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국민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킨 것은 단지 내에 부착된 택배차량 통제 협조문의 내용이다. 협조문에서는 택배기사가 정문으로 택배를 찾으러 오라는 연락이 오면 ‘카트로 배달 가능한데 그걸 제가 왜 찾으러 가야 하죠? 그건 기사님 업무 아닌가요?’라며 구체적으로 대응하라는 지시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 협조문의 지침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파트의 최고의 품격과 가치’를 위한 것이라고 언급됐다.
이러한 협조문의 내용은 국민들에게 집단 이기주의로 비춰졌다. 게시된 행동 지침이 택배 기사들의 업무 실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입주자들의 편의만을 위한 요구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생계가 어려운 택배 기사들에게 ‘갑질’하는 것이 품격을 위한 행동이냐”며 입주민들의 행동을 비판했다. 또한 유시민 작가는 한 방송에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인식이 입주민들에게 없는 것 같다. 품격 있고 가치 있는 아파트가 되려면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실버택배 대안 무산…
“국민의 세금 낭비할 수 없어”
다산 신도시 택배 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자 국토교통부는 ‘실버택배’ 라는 대안을 제시했다. 이는 택배업체가 아파트 단지까지 물품을 운송하면 아파트 단지 인근 노인들로 구성된 요원들이 집까지 손수레 등을 이용해 다시 배송하는 방식으로, 2007년부터 노인 일자리 창출을 위해 도입된 제도이다. 실버택배 방안을 채택한 회의에는 입주민 대표와 택배업체 관계자, 건설업계 관계자 및 김정렬 국토부 2차관이 참석했다.
그러나 실버택배 대안 실시에 대해 국민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제시된 대안에서는 실버택배 비용의 절반을 보건복지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부담해야 하는데, 입주민의 편의를 위한 행동에 국민들의 세금이 들어가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4월 17일 청와대 홈페이지에 실버택배 반대 청원을 제기한 청원자는 “택배 서비스는 공공서비스가 아니므로 국가가 책임질 영역이 아니다. 더군다나 다산신도시 입주자들이 택배 차량의 진입을 막은 것은 … 오로지 주민들의 이기심과 갑질로 인한 것이다”며 실버택배 관련 비용을 입주민이 전액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 청원은 한 달 동안 국민 302,082명의 동의를 얻었다.
결국 국민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다산 신도시의 실버택배 계획은 무산됐다. 청원에 답변한 김현미 국토부장관은 다산신도시 아파트와 같은 지상공원화 아파트 택배 문제와 관련해 “출입구에 택배 거점을 만들고 단지 내 배송인력을 투입하되 추가비용은 택배사와 입주민이 협의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대립 속에서 일어난 인간 소외 현상
이번 택배 대란에서는 두 가지 대립 양상이 눈길을 끌었다. 첫째로 입주민과 택배업체 사이의 대립이다. 택배차량 통제 협조문의 내용이 게시된 이후 일부 택배업체들은 다산 신도시 아파트 단지로의 배송을 거부했다. 아파트 단지에서 저상 차량 개조 등의 방안을 제시했지만, 택배업체의 거절로 이는 번번이 기각되었다. 두 번째는 국민들과 입주민 사이의 갈등이다. 입주민들의 집단 이기주의를 충족시키는 것에 세금이 쓰이기를 원하지 않는 국민들은 실버택배 대안에 거세게 반발했다.
한편 이런 대립 속에서 택배 대란의 당사자인 택배 기사들은 어떠한 결정권도 가지지 못한 채 일방적인 ‘을’의 입장에 위치한다. 택배업체가 다산 신도시 아파트 단지 내의 배송을 거부하며 주차장에 물품을 쌓아놓았을 때 입주민들의 불만은 고스란히 택배 기사들에게로 향했다. 결국 택배 기사들은 단지 내에서 카트를 직접 끌며 각 가구에 물품을 배달해야 했다. 한 택배 기사는 “멀리 있는 동은 오고 가는 데만 한 시간이 걸린다. 물품이 쌓여 적체되니까 이 단지에만 직원들이 하루에 다섯 명씩 나와서 몇 동씩 나눠서 배달한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택배업체도 택배 기사들에게 차가운 태도를 취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택배 기사들은 택배 회사의 직원이 아닌 개인사업자로 분류되며, 4대 보험도 적용받지 못한다. 입주민들이 저상 차량으로의 개조를 제안했을 때, 택배업체는 “차량 개조 비용을 주민 측이 부담하지 않으면 택배 기사들에게 부담시키겠다”며 책임을 떠넘겼다. 택배 차량을 개조하기 위해 드는 비용은 택배사의 부담이 아닌 개인 사업자인 택배 기사들의 부담이라는 것이다. 또한 택배 방침을 논의하는 회의에서는 택배업체 대표, 입주민 대표, 국토부 관계자가 참여했지만 택배 기사들은 논의 과정에서 제외되었다.
국민들의 관심조차 택배 기사들의 복지 향상보다는 아파트 입주민들의 집단 이기주의를 비판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다. 실버택배를 이용하면 택배 기사들의 부담은 줄일 수 있었지만, 자신들의 세금이 입주민들을 위해 쓰이기를 원하지 않는 국민들은 이를 반대했다. 결국 실버택배 대안이 취소되면서 택배 기사들이 손수레로 물품을 배달하는 현 처우의 개선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입주민과 택배 업체, 그리고 국민적 여론의 대립 속에서 택배 기사는 지시를 전달받는 객체가 되었을 뿐, 단 한 번도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입주민들과의, 택배 업체와의, 국민들과의 입장에서 택배 기사들은 일방적인 약자의 위치에 섰다. 택배 대란의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인물이 정작 의사 결정 과정에는 소외된 것이다.
택배 대란이 우리에게 남긴 것
다산 신도시 택배 대란은 많은 국민적 관심을 받았지만, 그 국민적 관심은 택배 기사들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택배 기사들은 여전히 손수레를 이용해 단지 곳곳에 물품을 배달하고 있으며, 운송 시간 증가는 고스란히 수익 감소로 돌아갔다. 실버택배 대안이 무산되면서 택배 기사들의 업무 부담 감소도, 노인들의 일자리 창출 기회 증가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와는 별개로 택배 대란이 가져온 긍정적인 영향은 분명 존재한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택배 기사들의 환경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졌고, 현재 택배 시스템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아파트 설계에 대한 비판 의식도 강해졌다. 김현미 국토부장관은 택배 기사 처우 개선을 위해 “택배요금과 기사 수수료를 신고하게 해 투명한 수익구조를 만들고 하루 노동시간도 최대 배송량 또는 최대 근로시간 등으로 기준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한 택배를 자동으로 분배하는 시설이나 자동 하역시설 등 택배 기사들의 노동 강도를 줄일 수 있는 시스템 도입도 추진하겠다고 덧붙였다.
오정원 기자 jungwon98@g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