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주 어느 날, “1년 뒤에 계획 있어?”라고 한 친구에게 물어봤다. 친구는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과목을 들어 대학원 갈 준비를 하고, 의경에 지원해보고, 떨어지면 다음 학기에 군대에 갈 거고, 학점은 몇 점 정도를 받아야 하고……” 등등 별로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떠벌렸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문득 내 미래가 한 시간의 틈도 없이 잘 짜인 방학 계획표처럼 느껴졌고, 나는 그 친구와 작은 말다툼을 했다. 그때, 내가 띄우곤 했던 돛단배가 생각났다.
한 때, 우리 집 앞에는 저수지가 있었다. 물이 어디서 흘러왔는지, 또 어디로 흘러나갔는지 기억나는 바는 없다. 다만, 물은 분명히 어디론가 흘렀다. 나는 항상 어머니께 돛단배를 만들어달라 졸랐고, 어머니는 그때마다 색종이 하나를 접어주셨다. 색종이가 떨어진 날 어찌나 울었던지, 그 이후로 한동안 우리 집에는 색종이 부족할 날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가만히 서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멀어져가는 돛단배를 바라보았다.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하면, 하나같이 “돛단배를 도대체 왜 본 건데?”라고 질문한다. 별 이상한 사람도 다 본다는 눈빛은 덤으로 말이다. 하기야 당장 누가 한 시간 동안만 돛단배를 봐달라 부탁하면, 나 같아도 미쳤냐고 되물을 게 분명하다.
구태여 어린 시절의 나를 변호해 보자면, 나는 돛단배가 떠다니는 모습을 마냥 좋아하는 이상한 애가 아니었다. 그 한 시간은 내게도 지루했다. 나는 돛단배가 보이는 한 시간 보다, 오히려 돛단배를 막 띄운 처음 10초와 돛단배가 사라진 그다음 한 시간이 더 좋았다.
처음 10초 동안, 나는 돛단배를 바라보며 설레었다. 돛단배마다 이름도 지어줬었다. 찢어질 듯 약한 배에게는 ‘타이타닉’, 보라색 배에는 ‘보라돌이’ 등등. 조금이라도 기울면 아찔했고. 바람을 만나 빠르게 돌진할 때는 짜릿했다.
그러다 돛단배가 사라지면, 나는 배가 어디로 갔을지를 상상했다. 어쩌면 물고기 떼를 만나 침몰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돛단배를 보고 누가 건져내어 집에 가져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음침한 하수구 아래를 탐험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내 머릿속에는 항상 수많은 ‘어쩌면’이 떠올랐다.
그중에서 어쩌면 돛단배가 태평양을 떠다닐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가장 좋았다. 나는 매일 새로운 조각배를 띄웠고 마찬가지로 새로운 여행을 생각했다. 돛단배를 바라보는 지루한 한 시간은, 그러니까 내겐 일종의 대가였던 셈이다.
최근 이때의 기억이 자꾸만 떠오른다. 특히 새벽에 숙제를 할 때면 유독 그날들의 두근거림이 그리워진다. 요새는 그런 감정들을 느낄 새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내일 퀴즈 걱정을 해야 하고, 다음 주까지 숙제를 다 할 계획을 짜야 하고, 시험공부 생각을 해야 하는 데 그럴 틈이 나올 리가 없다. 그러던 중에,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만약 어머니가 “돛단배는 하수처리장에서 무조건 걸러진단다”고 한마디 하셨다면, 내가 돛단배를 그렇게 좋아할 수 있었을까? 어차피 돛단배가 어디로 갈지 다 아는데 어디에 설레야 한단 말인가.
마찬가지로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누구나 할 법한 심심한 이야기들이 아니었다. “글쎄, 한 2달 정도 절에 들어가 볼까 하고” 라던지, “연극 단원이나 해볼까 해” 같이 두루뭉술하지만, 그 사람만의 여행이 기대되는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지스트 대나무 숲(이하, 지대숲)’은 학생들이 익명으로 자신의 고민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다. 지대숲에는 요사이 부쩍 ‘취직하려면 학점을 얼마나 잘 받아야 하나요?’나 ‘대학원 준비 어떻게 할까요?’같은 질문들이 늘었다. 하지만 그 중 누구도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닥친 내일을 위한 계획보다는 비현실적이더라도 가슴을 뛰게 하는 목표를 하나쯤 세워보는 게 어떨까 – 자신만의 여행을 위해 태평양으로 떠난 ‘보라돌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