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그 날을 마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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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9일 금남로에서 벌어진 시위 직후 시위대가 계엄군에게 체포당하는 중이다.

올해로 39주년을 맞는 5·18 민주화운동. 몇십 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많은 이들의 시계는 그날에 멈춰있다.

광주광역시 서구에 위치한 5·18 자유공원에는 당시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또한, 억지스러운 군사재판이 열렸던 상무대와 영창이 남아있는 슬픈 장소이기도 하다. <지스트신문>은 이곳에서 민주주의 역사를 써 내려간 김재귀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당시에 저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시민군의 기동타격대로 활동했던 김재귀 씨는 16살의 학생이었다. 기동타격대는 5·18 당시 진압군에 맞서 광주의 치안과 순찰을 책임졌던 부대이다. 50여 명의 젊은 시민으로 구성된 조직은 광주의 안전을 책임졌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나가지 말라며 문을 걸어 잠그고 막았어요. 결과가 어떻든지 재밌겠다 싶어서 몰래 시위에 따라갔죠.”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분위기에 휩쓸려 시위에 참여하게 됐다고 전했다. “그런데 한 이틀인가 있다가 손수레 같은 것에 시신 2구가 실려 오는 겁니다. 시위에 참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때였습니다.”

5월 19일 금남로에서 벌어진 시위 직후 시위대가 계엄군에게 체포당하는 중이다.
5월 19일 금남로에서 벌어진 시위 직후 시위대가 계엄군에게 체포당하는 중이다.

군부 정권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회를 몽둥이로 억누르기 시작했다. 군부는 독재에 반대하던 대학생을 연행했으며, 비상계엄령을 통해 시민의 자유를 옥죄였다. 이러한 상황은 광주에서도 다를 바 없었다. 80년 오월의 광주는 정부군과 시민군의 치열한 격전지였다. 계엄군은 거리의 시민들까지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시민들은 자신을 향한 조준사격에 맞서 시민군을 조직했다. 하지만 광주는 전남도청을 마지막으로 군홧발에 짓이겨져 무너졌다.

치열했던 최후의 저항
“계엄군이 도청에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사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계엄군이 온다는 첩보를 듣고, 일단은 시민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계림동이랑 학동 쪽으로 사람들을 분산시켰어요. 그리고 도청 앞 분수대와 정문, 상무관하고 맞닿은 문 부근에서 경계를 섰습니다.” 그는 기억을 되짚어가며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새벽에 잠시 피곤해서 잠이 들어버렸어요.” 그는 중간에 잠들어 부끄럽지만, 계엄군이 온다는 첩보에 며칠간 잘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때가 여름이라 새벽 5시만 넘어도 환하더라고요. 잠에서 딱 깨보니 계엄군이 이미 시위대를 진압하는 중이었습니다.”
“옆에 친구를 발로 툭툭 차면서 그냥 손들고 항복하자고 했습니다. 그 친구가 항복한다고 손을 들었는데 갑자기 총을 쏘더라고요. 그 친구가 맞고 나서 제가 손을 들어 항복했습니다. 그랬는데도 저한테 쐈습니다. 맞고 나서 보니 이미 도청을 지키던 사람들이 포승줄로 묶여서 트럭에 실리고 있었습니다.” 27일의 새벽을 이야기하는 그의 표정에서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총상 때문에 일단은 군의관한테 응급처치를 받은 후, 국군 통합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받았다고 한다. “치료받으면서 광주교도소로 조사받으러 계속 왔다 갔다 했죠. 영창에서 이틀인가 삼일인가 구금되고 재판이 끝난 후에 광주교도소로 이감됐습니다. 일주일 정도 지나고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났으니 총 6개월 정도 잡혀있었죠.” 꽃다워야 할 10대의 시간이지만, 이제는 아프게만 남아버린 기억을 무덤덤하게 말하는 그였다.

금남로 도청진압작전(작전명 화려한 휴가) 직후 시민군이 포승줄에 묶여 체포되고 있다. ( 사진 출처 = 5·18 기념문화센터 )
금남로 도청진압작전(작전명 화려한 휴가) 직후 시민군이 포승줄에 묶여 체포되고 있다.
( 사진 출처 = 5·18 기념문화센터 )

고문으로 얼룩진 5·18
많은 이들이 증언했듯이 상무대의 가혹 행위는 인권 유린을 넘어선 인간성 말살이었다. 조사받던 시민들에겐 억지 자백을 짜내기 위한 무자비한 폭력이 가해졌다. 특히 기동타격대로 활동했던 이들은 무력집단이라는 이유로 더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들에게는 고춧가루를 탄 물을 입에 붓거나, 날카로운 바늘로 손톱 밑을 찌르는 등 참담한 가혹 행위가 행해졌다. 무엇보다 그들은 배고픔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음식을 먹지 못했다. 오직 밥 세 숟가락, 국 조금만이 두 명에게 주어진 한 끼였다.

시간이 흐르고 진상조사를 거치며 유공자에게 보상금이 주어졌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보상이 절대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당시 오인사격으로 다쳤던 군인들은 4억에서 6억을 보상받고, 국립묘지에 묻혔어요. 지나가던 시민들까지 때려죽이던 군인들한테 이런 예우를 해주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는 이러한 보상 문제를 제쳐두고서라도 중요한 것은 지휘권자의 처벌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진실이 밝혀지고 합당한 처벌을 받으리라 생각합니다. 최근 다른 유공자들을 모아 5·18 역사왜곡처벌 농성단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전두환 씨와 정호영 씨 집 앞에서 농성했었고, 앞으로 다른 곳에서도 계속할 생각입니다. 법정에서 이들이 완전히 벌 받을 때까지 행동할 겁니다. 우리를 군홧발로 짓밟고 몽둥이로 때린 사람들이 떵떵거리며 사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그 사람들이 뉘우칠 때까지라도 끝까지 싸워보려고요.”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광주의 오월은 아직도 붙잡혀있다.
“그때만 떠올리면 아직도 잊히지도 않고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아요. 5월만 되면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아파요. 요즘도 잠잘 때 불을 못 꺼요. 누가 쫓아오고 몽둥이로 때리고 군홧발로 막 차고. 사람들이랑 같이 시위하고. 지금도 그런 장면이 수없이 생각나요. 잊을 수가 없어요.”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날의 기억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3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지나며 사회는 변했고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 또한 달라졌다. 광주의 오월이 더는 슬픔과 분노의 오월에 머물러있지 않았으면 한다. 이제는 우리의 오월이 진실과 통합의 시작이길 희망한다.


우리를 폭도로 끼워 맞추려
거짓 자백을 받아냈잖아요.
그래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사회가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세대는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김재귀 씨 인터뷰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