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7일 2019광주디자인비엔날레(이하 비엔날레)가 ‘휴머니티(Humanity)’라는 주제로 개막했다. 비엔날레는 본 전시가 열리는 광주비엔날레전시관을 비롯해 광주 시내 전시관 4곳(광주비엔날레전시관, 광주디자인센터,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은암미술관)에서 10월 31일까지 55일간 열린다. 이번 비엔날레를 관통한 대주제인 휴머니티는 관람객에게 묵직한 따뜻함과 독특한 영감을 선사한다.
본 전시를 취재하기 위해 광주비엔날레전시관으로 향했다. 전시관에 도착하면 이라는 상징 조형물이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이 조형물은 운송용 플라스틱 상자 여러 개가 붙어있는 형태로 시민들이 그 위를 걸어 다닐 수도 있고 앉아서 사색할 수도 있다. 작품인 동시에 만남의 장소로 활용되는 조형을 통해 이번 비엔날레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를 상기할 수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소주제가 서로 다른 5개의 갤러리가 있다. 이들은 전부 연결돼 있어 한 번에 둘러보기 좋다. 인간과 디자인이라는 거대한 주제에서 시작해 주거와 공공 디자인, 사람을 위한 기술, 휴먼시티와 광주다움을 다루며 주제를 좁혀오는 방식이다.
사람 사는 세상, 함께 사는 세상
노란 풍선 위에 기분을 나타내는 영어 단어가 쓰여 있다. 글자 하나하나가 눈과 입이 돼 표정을 만든다. 이모티콘을 연상케 하는 이 작품은 키스미클로스의 이다. 이모티콘은 현대사회를 대표하는 의사소통 방식 중 하나로 현대인의 소통에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작가는 온라인상에서 많이 사용하는 이모티콘을 오프라인으로 꺼내온 것이다.
다양한 표정을 나타낸 풍선들이 줄지어 있다. 그때 축 늘어져 기죽은 것처럼 보이는 마지막 풍선이 눈에 밟힌다. 처음엔 관람객이 풍선을 만지다 구멍을 내 공기가 빠진 것으로 생각했다. 그때 도슨트(Docent)가 “여기 공기가 빠진 풍선이 보이시죠? 사실 이건 작가가 의도한 것입니다”라고 알려줬다. 다시 보니 풍선에 “sorry(미안해)”라고 쓰여 있다.
다면체 모양 구조물에 금속 조각들이 붙어 있는 댄 루스가르데의 도 눈길을 끈다. 알루미늄 포일처럼 보이는 금속 조각은 온도에 민감하다. 관객이 손을 가까이 가져다 대면 조각이 휘며 구조물 안의 빛이 밖으로 새어 나온다. 여름이 되면 피어나는 연꽃 같기도 하고 체온을 느끼면 두근거리는 심장 같기도 하다.
지난 백 년에서 다음 백 년을 보다
국제관에서는 바우하우스 기념전을 열고 있다. 올해로 바우하우스가 100주년을 맞았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는 미술과 공예, 사진, 건축을 교육하는 학교였는데, 이 학교의 양식은 현대식 건축과 디자인에 큰 영향을 줬다고 한다. 비엔날레에서는 단순히 100주년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공예 활동과 단순함을 강조한 바우하우스 정신을 휴머니티의 관점에서 재조명한다.
전시관 한쪽에 바우하우스 출신 디자이너들이 만든 가구와 함께 사진 한 장이 걸려있다. 가면을 쓴 채 의자에 앉은 여성을 찍은 것이었다. 그때 한 시민이 사진에 대해 질문했고 도슨트는 “좋은 질문을 해주셨어요”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이 의자는 마르셀 브로이어의 디자인이며 바실리 의자라 불린다. 철제 뼈대로 의자를 만든 것이 당시에는 획기적이었다고 한다. 1925년을 살았던 사람들은 철재로 가구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의자는 모더니즘의 상징으로 꼽히기도 한다.
현대 작가들은 바우하우스를 어떻게 바라볼까? 두 가지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첫 번째는 할머니가 뜨개질해서 만든 것처럼 보이는 <자라나는 매듭>이다. 사실 이 작품은 각양각색의 전선으로 만든 것이다. 바실리 의자와 마찬가지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전선으로 만든 목도리나 양말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가장 현대적인 재료로 만든 수공예 창작물은 바우하우스 실험정신을 오늘날 사회에 대입하고 있다.
두 번째는 <이상-날개 – 2019>다. 한글 음운이 블록 위에 쓰여 있고 이 블록이 조립돼 전체 작품을 나타낸다. 관람객은 시의 내용을 읽기보다 간단한 패턴의 조합으로써의 한글 디자인을 보게 된다. 이 작품은 바우하우스의 철학으로 이상의 소설을 읽어냈다. 구조를 이루는 최소한의 기본 요소들만 사용해 간결한 형태로 예술성을 표출하려는 바우하우스의 기능 미학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국제관에서 만난 조선대학교 학생에게 바우하우스 관련 전시에 관해 물었다. “건축학과에 오게 되면 바우하우스 얘기는 입학할 때부터 계속 들어요. 이번 비엔날레에선 바우하우스 역사나 흐름에 대해 집중하지 않고 현대에서 이를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는지 보여줬어요”라며 바우하우스에 대한 접근 방법이 새로웠다고 했다. 덧붙여, 이런 접근 방법은 디자인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바우하우스를 알리는 데에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휴먼시티 광주, 광주다움을 논하다
주제관과 국제관을 거쳐 체험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체험관의 주제는 ‘휴머니티(Humanity)’에 철자 하나를 더한 ‘휴먼시티(Human City)’이다. 다양한 기업이 각자의 제품을 전시하며 휴먼시티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그중에서 한 사회적 기업에서 만든 친환경 재생지 노트북 세움대가 돋보인다. 친환경 재료를 사용한다는 설명에 관람객들이 놀라자 도슨트는 “이 기업의 직원 절반 이상이 장애인입니다. 이 세움대들은 모두 그분들이 만드신 거예요”라고 했다. 채용과정에서도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모습에 한 번 더 놀랐다.
<안주>라는 이름의 알록달록한 이글루 모양 조형물도 인상 깊다. 방석을 이어 붙여 만든 이 조형물은 지진이 나서 가구가 쓰러져도 사람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멋있고 세련된 제품을 두고 ‘디자인이 좋다’고 한다. 그러나 이 조형물을 보며 ‘사람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진정 좋은 디자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전시물을 통해 디자인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한편 인간이 가진 따뜻함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 갤러리의 주제는 광주다움이다. 광주다움은 휴먼시티로서 광주의 지역문화와 고유함, 나아가 광주시민의 정체성이다. 비즈니스 라운지에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디자인 요소로 활용한 노트와 각양각색의 삽화가 그려진 주먹밥 포장지가 전시돼 있다. 광주의 언어문화와 식문화를 디자인에 담아낸다. 광주다움을 상품에 적용한 브랜드는 지역민들에게 친근함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비엔날레가 던진 휴머니티란 울림은 힘들고 지루한 일상에 잔잔한 파고를 만든다. 비엔날레의 본 전시와 특별전을 둘러보며 느낀 생생한 경험과 감동을 글자로 전부 담아낼 수는 없다. 휴머니티가 무르익는 가을, 비엔날레에 찾아가 추억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