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기념관·평화시장 현장 스케치
50년 전인 1970년 11월 13일, 청년 전태일은 노동자의 권리를 부르짖으며 온몸에 불을 붙였다. 근로기준법 화형식이었다. 분신 직후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산화했다. 그의 나이는 스물 셋이었다.
전태일은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동지들에게 “나의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올해 들어 과로사로 죽음을 맞은 택배 노동자가 10명이 넘는다. 생활고를 호소하며 극단적 선택을 한 사례도 있다. 노동자의 현실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하기 어렵다. 전태일의 죽음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대목이다.
지난 6일,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을 찾았다. 지난해 4월 청계천 앞에 세워진 기념관 외벽에는 흰 글씨가 가득했다. 1969년 전태일이 근로감독관에게 보낸 진정서다.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동심을 간직한 여공들에게 ‘사회생활이라는 웅장한 무대는 가장 메마른 면과 가장 비참한 곳만’을 보여준다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청계, 내 청春, 나의 봄> 전시가 열리는 기념관에는 카메라를 들고 영상을 찍는 청년, 자녀에게 전시물을 열심히 설명하는 부모, 손을 맞잡은 노부부까지 많은 사람이 오갔다. ‘일하면서 배우자!’는 모토로 성장하면서 우리나라 민주노동운동의 생생한 역사가 된 청계피복노동조합의 활동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뜻 깊은 자리였다.
기념관 입구에서 방문자를 맞이하는 박원섭(65) 씨는 열여섯 살이 되던 1973년부터 평화시장에서 일했고 전태일을 알게 되면서 노동운동에 참여했다고 전했다.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이 항상 ‘정의롭게 살아라, 시간은 우리들의 편이다’라고 말했고,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왔다는 설명이다.
박원섭 씨는 “전태일은 평화시장 여공의 노동환경을 굉장히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전태일 시대의 여공은 현재에도 비정규직, 특수 고용자, 아르바이트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존재한다. 또 매일같이 이슬처럼, 연기처럼 사라진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누가 죽었는지 아무도 몰랐지만 지금은 그 사람들에 관해 얘기한다는 것이다. 긍정적인 발전을 이룬 것이 아니냐?”라며 전태일의 희생을 평가했다.
전태일기념관에서 평화시장 입구까지는 도보로 삼십 분 거리. 오후 6시가 다가오자 전태일 열사가 분신했던 전태일다리 앞에 사람들이 모였다. <전태일 50주기 추모 문화제>를 보기 위해서다. 불꽃, 바람, 함성을 주제로 총 3막에 걸쳐 문화 공연이 이어졌다.
오토바이에 철물을 가득 싣고 길을 재촉하는 할아버지, 발걸음이 무거운 중년 남성, 바구니를 머리에 얹고 걸음을 서두르는 아주머니가 추모 인파와 뒤섞이는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추모 문화제 공연을 감상하던 직장인 박근화(32) 씨는 “지금도 여전히 많은 젊은 청년이 열악한 노동 환경과 저임금에 시달린다. 돌아가신 전태일 열사가 이런 세태를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하다”면서 “세상이 좀 더 많이 바뀌어서 더는 희생이 필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전태일다리에서 평화시장 방향으로 몇 걸음 걸으면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항거터가 있다. 그가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 속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친 곳이다.
항거터 옆, 한자리에서 30년 넘게 장사를 하고 있다는 평화시장 상인 A씨를 만났다. A씨는 “2003년에 경제성장의 상징이던 청계고가도로를 철거했다. 고가도로를 없애고 청계천을 복구하면서 전태일다리가 생긴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다리가 생겼을 때 노동운동과 민주화에 힘쓴 이신범, 장기표, 백기완 등 1세대 운동가가 다녀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전태일을 기억하고 찾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게 역사의 흐름이다”라며 감회를 밝혔다.
전태일 혼자 애썼던 50년 전과 많은 이들이 그의 숭고한 뜻을 이으려고 노력하는 지금은 노동운동의 파급효과가 분명 다를 것이다. 전태일 50주기를 맞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꿈을 이어가겠다’는 다짐과 실천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