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팔 아직 안끝났어요’… 우리 곁에 숨 쉬는 5월의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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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 윤세림 기자
삽화 = 윤세림 기자

1980년 5월, 열흘에 걸쳐 일어난 5·18민주화운동이 2023년 올해로써 43주년을 맞이했다. 5·18민주화운동은 1950년 6.25 전쟁 발발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정치적 비극이다. 동시에 오늘날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이끈 주역으로서 그 향기와 그림자를 함께 드러낸다.

지난 5월 18일, 5·18민주화운동 43주년을 맞아 국립5·18민주묘지에서 기념식이 열렸다. 전날인 5월 17일에는 광주광역시 금남로에서 ‘우리는 끝까지 정의파다’라는 주제 아래 민주 평화 대행진과 5·18 전야제가 진행됐다. 1980년 5월의 상처를 기억하고 당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열흘간 이루어진 5·18민주화운동은 반란 군부의 비상식적 진압에 맞서 민주화를 요구한 의로운 항쟁이다. 시민들이 스스로 무장하고 불법적인 군인 집단에 저항한 사건은 한국 전쟁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참담했던 이 비극의 피해 규모는 아직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따르면 항쟁 열흘 동안 최소 163명의 민간인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또한 계엄 공수가 휘두른 대검 및 곤봉에 의해 각종 부상을 입은 이들을 포함하면 최소 3천여 명 이상이 집계된다. 하지만 계엄군의 추가 보복을 우려해 부상을 감추기도 했기에, 전체 규모는 확정되지 않았다. 이 밖에도 고문이나 부상 후유증으로 트라우마를 겪다 사망한 시민도 수백 명에 달한다.

광주시민이 보여준 항쟁의 장렬한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는 원천이 됐다. 하지만 5·18의 역사를 철저하게 은폐하고 왜곡하려는 흐름이 5·18 당시부터 지속됐다. 광주시민을 폭도로 매도하고, 계엄군의 학살행위를 군의 자위권 발동이라며 거짓 논리를 내세웠다. 이외에도 북한군 침투설과 같은 가짜 뉴스도 확산됐다.

이러한 왜곡과 폄훼는 2018년 제정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특별법’과 2020년부터 국가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는 진상규명 활동으로 천천히 회복되고 있다. <지스트신문>은 5·18 유공자와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을 만나 그날의 오월 정신, 그리고 그 중심이 된 학생운동이 가지는 함의를 취재했다.

 

5·18 증언

(증언자: 5·18 구속 부상자회 박동만 씨)

1980년 4월부터 전남대학교(이하 전남대) 총학생회에서 나온 홍보물을 인쇄해 준 혐의로 1980년 6월 구속돼 같은 해 10월 24일 석방됐다. 당시만 해도 인쇄술이 널리 보급되지 않아 학생들은 유인물을 직접 등사기로 제작하거나 인쇄소에 맡기는 형편이었다. 4월부터 전국적으로 민주화 바람이 불자, 전남대학교 학생들도 학내집회를 벌이며 유인물 인쇄를 부탁했다. 주로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 섭외부장이었던 이청조 씨가 유인물을 들고 찾아왔다. 유인물에는 독재 반대와 학내 민주화를 요구하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당시 계엄령이 선포됐던 터라 모든 인쇄물은 보안사에 사전검열을 맡아야 했다. 하지만 전남대 학생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민주화를 열망하며 유인물을 뿌리고 곳곳에 알리고 하는데, 이를 정부에 당연히 알릴 수 없었다. 그렇게 1980년 5월 14일까지 전남대 총학생회에서 가져온 인쇄물을 모두 인쇄하고 나니,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는 곳곳에서 시위가 전개됐고, 5월 21일 집단 발포 때에는 금남로 일대가 피범벅이 되었다. 그때는 공포감이 너무 커서 단지 주위로부터 소식만 들으며 27일까지 인쇄소 문을 닫고 숨어 있었다.

이후 1980년 6월 6일 다시 인쇄소를 운영하던 와중, 광주 경찰서 형사가 찾아와 전남대학교 섭외부장을 만났냐고 물어보며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프차에 강제로 타서 끌려 들어간 곳은 광주 상무대였다. 형사들은 도착하자마자 이유 없이 무수한 구타를 시작했다. 나뿐만 아니라 상무대 영창 곳곳에서 각종 욕설과 구타 소리, 뒹굴고 있는 사람들 비명이 들렸다. 한동안 두드려 패고 난 뒤 조사를 시작하자, 인쇄를 해준 모든 일을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실제로 내가 했던 인쇄 작업은 생계를 위한 것으로, 폭동 활동에 가담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형사들은 내란음모 가담에 대한 자백을 강요했다. 결국, 조서에는 돈을 하나도 받지 않고 유인물을 인쇄했으며 이는 운동의 한 부분으로 참여했기에 모든 일에 책임이 있다고 기록했다.

그 이후에도 보안대에서는 전남대 총학생회 섭외부장과의 접점을 물으며 조서 작성과 구타가 반복됐다. 2달 동안 그들은 우리를 북한 간첩단으로 오명을 씌우며 자백을 강요했고, 요구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구타한 후 감옥에 집어넣었다. 36명이 정원인 공간에 97명이 들어가 함께 생활했다. 그 여름날 숨 막힌 채 살다가 간혹 나오면 두들겨 맞는 과정에서 여러 번 졸도했다. 당시 군인들은 나를 끌고 가 국군광주통합병원에 집어넣었는데, 병원 신세는 상무대에 비해 천국과도 같았다.

그렇게 한 달여 동안 치료를 받던 중 내란음모죄와 계엄법 위반 죄목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요, 정치활동 금지”형을 받았다. 다행히 1980년 10월 24일 무죄판결로 출소해 회복하긴 했지만, 이후에도 형사의 미행을 받으며 그야말로 범죄자 신세가 됐다.

 

5·18민주화운동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시민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박동만: 나는 아직도 1980년도 5·18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며 당황을 금치 못한다. 몇 년 전, 5·18자유공원(옛 상무대 법정 영창)에 방문해 1980년 당시 투옥됐던 감옥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이런 두려움과 불안함에 사로잡혀 이제껏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등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된 활동에 참여하지도 못했다.

앞으로 국가 차원의 피해보상이 계속 이루어진다 해도 그날, 무너진 도시의 상흔은 광주시민 모두에게 앞으로도 여전할 것이다. 소설 ‘소년이 온다’에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라는 문구가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문구가 왜 나왔을지, 지금의 평범한 삶이 어디서 왔을지 묻고 싶다. 그 이면에는 광주와 이 나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끝까지 지킨 광주시민들의 거룩한 헌신과 희생이 있었음을 절대 잊지 않아 줬으면 한다.

홍인화(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중심에는 학생과 청소년이 있었다. 당시 ‘이러다 광주의 젊은 자식들이 다 죽는다’라며 시민군이 등장했다. ‘학생’이라는 시기는 가장 역사의식이 있고 들끓는 정의감과 의협심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도 청소년들은 사회의 공정성에 대해 늘 의문을 제기한다. 때로는 개인적이고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런 특성이 나라를 사랑하는 공정성과 맞물렸을 때 이기적인 것이 먼저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정말로 절차상 공정한지 판단하고, 부당한 현실에 거리낌 없이 달려들어 싸우는 그들의 모습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최근에 광주를 방문한 전우원 씨도 MZ세대의 한 흐름으로서 5·18민주화운동의 공정성을 파악하고 집안의 베일을 뚫고 나온 올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그야말로 생명을 나눈 절대 공동체를 경험했다. 시민들은 서로 간의 공의, 대한민국의 공의를 위해 몸소 자기의 것을 나눴다. 민주주의의 기초라 불리는 5·18민주화운동이 물려주는 정신은 이렇게 서로 사랑하고 내 것을 베푸는 모습을 일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더 나아가 5·18 유공자분들이 그토록 바랐던 오늘날의 평범한 민주주의에 감사하고 1980년 5월의 공기에 익숙해지길 기대한다.

 

5.18민주화운동에서 광주시민은 계엄군에게는 꺾이지 않는 시민군이었으며, 부상자에게는 천사 같은 간호사이자 동지였다. 당시 광주시민은 유례없는 공동체 정신과, 결집성 및 저항 정신을 보여줬고, 이는 오늘날의 ‘오월 정신’으로 이어졌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는 ‘당신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5.18민주화운동의 회복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날의 상흔이 온전히 치유될 때까지 그들도, 우리도, 나라도, 역사도 그날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