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벨트, SF가 열어주는 새로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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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8일 SF 작가 김초엽이 GIST에서 ‘SF, 다른 세계를 감각하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진행했다. 김초엽 작가(이하 김 작가)는 포항공대 생화학 대학원 석사 졸업 이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과 ‘관내분실’로 등단한 이공계 출신 작가다.

SF소설, 무엇을 위해 쓰고 읽히나
정확히 정의하긴 어렵지만 SF(Science Fiction)은 과학적 방법론이 쓰인다는 특징이 있다고 김 작가는 설명했다. 기존의 문학은 인간의 내면에 집중하며, 분석하기보다는 받아들이고자 한다. 반면 SF소설은 과학적 방법론을 택한다. 무언가를 분석하고 설명하며 인간과 과학, 인간과 지구, 인간과 동식물 등 비인간과의 관계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SF는 기존의 문학이나 다른 장르에서 잘 다루지 않는 인간의 다양한 면을 다룬다. 김 작가는 이것이 SF가 왜 쓰이는가에 대한 답이라면, 읽는 이유는 “경외감” 때문이라고 답했다. 본래 경외감은 sense of wonder로 우리가 속해 있는 세계가 아주 작다는 걸 인지할 때 느껴지는 감각이다. 칼 세이건의 요청으로 촬영된 ‘창백한 푸른 점’의 사진이 주는 감동이 그 예다.
그런데 김 작가는 최근 SF는 고전적인 경외감이 아니라 “Umbelt(움벨트)”를 준다고 말한다.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조금만 시각을 바꿔도 새로운 세계와 경외감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 작가는 곰팡이들의 모호하고 기이한 성질을 아주 깊게 탐구한 책인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 동물의 감각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인 ‘이토록 굉장한 세계’, 토머스 네이글의 ‘박쥐가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라는 논문 등을 언급하며, 인간의 세계가 얼마나 한정적인지를 강조한다. 인간은 가시광선 영역에서 보고, 가청주파수 대역의 소리만 들으며, 자기자신을 하나의 개체로만 인지한다. 반면 새와 거북이들은 전신으로 자기장을 느끼고, 곰팡이와 지의류(복합 유기체의 일종)등은 개체이자 군체로서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 우리 인간과 다른 존재는 동식물뿐만이 아니다. 김 작가는 ‘탈인지’라는 책을 들며 AI와 같은 비생물도 우리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흔히들 AI가 인간과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지 궁금해하지만, 김 작가는 애초에 감정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인간의 감정은 뇌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몸의 반응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몸, 즉 반도체와 금속으로 이루어진 컴퓨터가 감정과 유사한 것을 느끼게 되더라도, 우리 인간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으리란 것이다. 김 작가는 ‘탈인지’의 “우리가 아마도 결코 알 수 없을 많은 것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의 경계를 탐구함으로써 여전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를 인용하며 바로 이것이 SF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소설로서 사고실험을 하고, 무지의 범위를 더듬어가는 과정이라고 말이다.
김 작가는 앞서 언급된 자료들과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의 장편인 ‘파견자들’을 집필했다고 밝혔다. ‘파견자들’은 인간이 곰팡이라는 종과 공존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사고실험이다. 김 작가는 “공존은 단지 따듯한 것이 아니라, 생각보다 차갑고, 자신의 중요한 것을 포기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이라며 인간이 인간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곰팡이라는 종과 대등해졌을 때 인간이 포기할 것이 무엇인지를 상상했다고 설명했다.

SF의 과학은 허구 과학,그럼에도 보여주는 것이 있다
김 작가는 “종종 과학을 잘 모르는 사람도 SF를 읽고 쓸 수 있냐는 질문을 받는다”라고 말하며 그런 건 상관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사실 SF에 나오는 과학은 진짜 현실 세계의 과학이 아니라 가짜, 즉 허구의 과학이라고 덧붙였다. 허구의 과학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지금의 과학이 매우 진보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 과학기술(유전자 조작 인간, 스팀펑크 등)이나 미래에도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초광속 여행, 시간여행, 평행우주로 말이다. 그런데도 SF 작가들은 이런 허구의 과학에 어떻게든 설명을 붙이고 그럴듯한 이론을 가져와 말이 되는 것처럼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김 작가는 그 이유가 첫 번째는 특정 사고실험을 하고 싶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인간과 과학기술의 관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서술했다. 김 작가는 자신의 데뷔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통해 그것을 설명한다. 이 작품은 우주 시대, 웜홀의 발견으로 더 이상 초광속 우주선이 운행되지 않는 시대의 이야기다. 가족들을 다른 행성에 두고 온 노인 안나는 웜홀이라는 더 빠른 교통수단의 발달로 가족들이 있는 행성으로 갈 방법이 없어졌다. 김 작가는 이 작품을 쓰면서 사회 문제를 비판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작품 발간 이후 누군가 보여준 뉴스 기사에 김 작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기사가 KTX 개통 이후 어느 시골 마을을 지나던 무궁화호의 운행이 멈춰 서울에 있는 자녀를 만나러 가기 힘들어진 할머니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김 작가는 이처럼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현실의 문제를 담아낸 것처럼, 허구의 과학은 인간과 과학기술의 관계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김 작가는 엘리자베스의 문의 장편 ‘어둠의 속도’를 언급하며 어떤 장애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당사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도 설명했다. SF는 기술 발전이 무조건 인간에게 구원이 되지는 않음을 SF가 보여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김 작가의 첫 장편인 ‘지구 끝의 온실’에서도 그런 주제가 드러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는 사이보그가 있다. 김 작가는 인공심장박동기를 단 사람들을 연구한 ‘사이보그 유지보수학’이라는 논문을 보고, 실제 사이보그는 성가신 성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우리가 막연히 상상하는 사이보그와 달리 실제로는 끊임없이 엔지니어들에게 간섭받아야하기 때문이다. 이것에 착안해 그 작품 속 사이보그는 멸망한 세상의 유일한 정비공인 다른 인물에게 종속되는 설정이 됐다고 김 작가는 설명했다. 허구의 과학을 다루고 있지만, 현실의 이야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어 진행된 Q&A에서 김 작가는 자신의 작업 과정과 SF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Q. 소설의 소재나 영감은 어디서?
과학이기도 하고, 뜬금없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오지 않는 우주선을 기다리는 아주 쓸쓸한 노인의 이미지가 떠올라서 그를 바탕으로 썼다. 드물지만 과학 논문이나 기사에서 소재를 얻기도 하고, 가상의 세계에 있을 법한 것을 디자인하는 사변적 디자인에 관심이 있어서 여기서도 아이디어를 얻고 있다. 중요한 건 다양한 아이디어를 수집하고 묶는 것이다.

Q. 차기작에 대해서
8월에 중단편집이 하나 나올 예정이고, 아까 이야기한 디자인 관련 작품도 여기 있다.

Q. 생성형 AI의 도움을 받아 소설을 쓰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언어모델은 보편적인 결과를 출력하는 모델이라 창의적인 작업에는 그닥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자료조사 정도라면 유용하겠지만, 소설 집필에는 잘 모르겠다. 유용한가를 떠나서 윤리적인 문제도 있을 거다.

이 밖에도 김 작가는 GIST 재학생들의 다양한 질문에 답하며 뜻깊은 강연을 마무리했다. 이어진 사인회도 관객 대부분이 참여하며 성황리에 끝났다.